자유칼럼

제삿날 (2010년 1월 13일)

divicom 2010. 1. 13. 10:47

오늘은 제삿날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도 신경 쓸 것이 적지 않지만 돌아가신 분을 맞으려면 훨씬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영하 십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지만 문을 활짝 열어 청소를 하고 여기저기 묵은 때도 벗겨냅니다. 어제 장을 보았지만 오늘 한 번 더 나가야 합니다. 떡을 하지 못했으니 사러 가야 합니다. 나간 김에 두어 가지 더 사와야겠습니다. 여유 있는 살림은 아니지만 저 세상에서 이 세상까지 먼 길 오실 분을 생각하면 한 가지라도 더 장만해 상에 올리고 싶습니다.

“제사? 쓸데없는 일이야. 귀신이 있어? 있다 해도, 와서 음식을 먹어? 귀신이 음식을 먹는다면 음식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잖아?” 똑똑한 친구가 힐난조로 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제사상에 올려놓은 음식은 제사가 끝난 후에도 그대로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닐까요? 저 세상의 주민들은 육체가 없으니 식사하는 법도 이곳 사람들의 식사법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

제사는 가신 이를 기억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커피를 마시며 옛 사람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기억하고, 어떤 이들은 음식을 차려놓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삶은 종일 근무하는 일터와 같아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커피나 술을 마시며 옛일을 생각하던 사람은 잔을 내려놓고 현실의 길로 나서며 추억에서 벗어납니다. 제사가 좋은 건 옛 생각을 꽤 여러 시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겐 세상일 모두가 생각을 부추기는 경험이겠지만 제사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일도 드물 겁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만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만나지 못한다는 건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음식을 준비하는 손이 아무리 바빠도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점령당한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집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런 질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평소에 하기 어려운 철학적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상 앞에서 몸을 굽히면 늘 눈이 젖어옵니다. 제사상의 주인을 알든 모르든, 제사상 저편과 이편, 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이와 우리가 나눠가졌을 바다처럼 큰 공통점과 물거품처럼 작았을 차이점도 생각합니다. 희로애락과 불면, 죽는 날까지 ‘살아 있기 위해’ 취했을 무수한 포즈들, 죽음 저편을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꼈을 두려움, 혹은 마침내 죽음이 무언지를 깨달으며 느꼈을 회한 혹은 기쁨 혹은 자유...

여러 가지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납니다.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건 우상 숭배라고 제사를 접는 신자들, 귀신이 없으니 제사가 필요 없다는 똑똑이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가사노동이 더 무거워지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주부들... 모두 일리 있는 말이지만 일리 있는 말이 곧 진리는 아니니 곰곰 생각해봅니다.

제사는 음식상 앞에서 절을 하는 행위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제사는, 죽은 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돌이켜보고, 옛 추억을 불러내어 현실에 찌든 마음을 순화 또는 정화하고, 죽은 이를 함께 생각함으로써 남은 가족 간의 우의를 다지며, 무엇보다 지금 세상에서 찾기 힘든 ‘경건함’을 맛보는 시간이니까요.

그러니 제사는 노동을 부과하는 동시에 기회를 부여합니다. 형제가 여럿이라면, 순서를 정해 차례를 주관하거나 제사를 나눠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노동의 분담은 물론 기회의 균등이라는 측면에서도 공정할 테니까요. 맏아들 가족에게만 제사 주재를 요구하면 준비하는 사람도 참여하는 사람도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은 ‘제사’가 ‘특정인의 고통’과 동의어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겨울 강처럼 느리게 흐르던 때, 삼대, 사대가 함께 살던 시절엔 여러 대의 조상 한 분 한 분을 위한 제사상을 따로 차릴 수 있었겠지만 삶이 고속철처럼 빠르게 내닫는 오늘날엔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대의 조상님들을 위한 상은 설과 추석에만 차리고, 개별 제사는 직접 관계를 맺었던 분들, 즉 조부모나 부모만을 위해 거행하는 식으로 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연세 많은 어른들 중엔 무슨 제사를 나눠 지내느냐, 제사 장소가 바뀌면 조상의 혼령이 찾아오지 못한다 하는 식의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 정도 형식의 변화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육체를 벗어난 분들에게 장소의 변화 같은 건 문제 되지 않을 테니 산 사람의 고정관념이 오히려 문제일 겁니다.

제사를 지내는 집안과 지내지 않는 집안을 관찰해보면 지내는 집안 구성원들의 우애가 더 깊을 겁니다. 죽은 이들과의 만남은 옳은 삶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내’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와 인연의 얽힘이며 발로임을 상기하게 하니까요.

가족에 대해 남만큼도 모르는 게 가족입니다. 제사상을 앞에 두고 가신 이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늘 데면데면하던 할아버지와 손녀,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조금만 노력하여 가신 이가 살던 시대상을 젊은이들에게 얘기해주면 나라가 게을리 하는 국사 교육을 보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게 되면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쉬워지고 언젠가 빈 몸으로 나서게 될 긴 여행에 대한 두려움도 차차 걷힐지 모릅니다.

제사를 지내는 일이 너무 힘들면 설이든 추석이든 일 년에 한번이라도 죽은 이들과의 해후를 꾀하면 어떨까요? 한 달 후면 설입니다. “제사 같은 게 무슨 소용이야!” 하고 여행을 떠나는 대신 오순도순 죽은 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집안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그만 떡을 사러 나가야겠습니다. 제사 후 혼곤한 잠에 빠져들 생각을 하니 요 며칠 불면으로 어설펐던 몸과 마음이 벌써 가볍습니다. 오늘은 제삿날, 반가운 해후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