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75: 하루 (2021년 3월 25일)

divicom 2021. 3. 25. 08:56

어젠 어머니의 92번 째 생신이었습니다.

아흔두 번째 생일을 맞는 느낌을 여쭈니

"아주 좋아, 만날 생일이면 좋겠어"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제 나이 때쯤 달게 입으셨던 코트를 입으니

쑥스러웠습니다. 늘 무채색인 제 옷과 달리

어머니의 옷 중엔 화려한 옷이 많습니다.

 

파스타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딸들과 며느리들이

파스타집에 모였습니다. 식사와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의료진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엔 아픈 동생과 연세암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엔 식당보다 사람이 많았습니다.

거대한 고통의 공간에서 고통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병원 건너편 정류장에서 601번 버스를 탔습니다.

처음 타보는 번호의 버스였지만 승객들은 낯익었습니다.

모두 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 아무하고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경복궁' 역에 내려 제 첫 직장이 있었던 중학동 언덕을

걸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부터 12년을 보낸 곳,

낯선 건물이 서 있는데도 낯익었습니다.

 

조계사 앞뜰엔 등이 가득 달려 있어 장이 선 것 같았습니다.

알록달록 등 아래 서니 어머니의 옷으로 화려한 몸이 더 화려해지며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낯익은 질문이 찾아왔습니다.

등 지붕 아래를 벗어나니 하늘이 보였습니다.

하아...

 

빵집의 빵은 비쌌으나 거의 팔리고 없었습니다.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단법인 봄>의

지난 10년을 기록한 보고서를 보며, 그 10년을 이룬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열심히

일한 친구와 함께였지만 빵도 사주지 못했습니다.

 

272번 버스의 풍경은 601번 버스와 같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낯익은 채소가게로 들어갔습니다.

고구마 두 바구니 5천 원, 양파 한 바구니 3천 원.

 

마침내 낯익고 낯선 집에 도착했습니다.

지친 몸이 잠들기 전 잠시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91년은 어떤 하루들의 모음이기에

92번 째 생일을 맞는 마음이 '아주' 좋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