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0

노년일기 36: 나이야, 미안해 (2020년 6월 27일)

엊그제 밤새 비 내리고 난 새벽 회색 하늘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서 저 하늘 아래를 걷고 싶었습니다. 손바닥 노트, 볼펜, 비상금이 든 카드 지갑 하나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 디스크엔 ‘빨리 걷기’가 명약이라기에 아침 일찍 홍제천변을 걷곤 했는데 그날은 하늘에 이끌려 더 일찍 나선 겁니다. 비 그친 세상에선 숲의 향기가 났습니다. 낡은 운동화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습니다. 성큼성큼 신나게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작은 물고기의 비늘 같은 빗방울이 날렸지만 저는 가뭄 끝에 비를 만난 풀처럼 행복했습니다. 신나게 걸은 후엔 천변 바로 윗길에 있는 편의점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는 자꾸 굵어지고 바람도 차가워졌지만, 진초록 차양 아래서 비바람 향기를 맡으며 마..

나의 이야기 2020.06.27

노년 일기 34: 작은 병, 작은 다짐 (2020년 6월 20일)

산책을 하는데 무언가가 오른쪽 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먼지인지 날벌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심하게 아프지 않아 가던 길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후 죽염 안약으로 소독하고 생수로 씻어내니 괜찮은 듯했습니다. 마침 끝내야 할 번역이 있어 몇 시간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오른쪽 눈이 자꾸 거북해진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무시하고 번역을 끝냈습니다. 번역본을 보내고 나니 눈의 거북함이 괴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래 눈꺼풀 안쪽이 벌겋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화농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부위든 화농이 되어가는 동안은 괴롭지만 막상 화농이 되어 고름이 차면 고통이 줄어듭니다. 팔이나 다리처럼 제 손으로 고름을 제거할 수 있는 곳이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눈은 눈이니 가는 게 좋겠지요. 평생..

나의 이야기 2020.06.20

노년일기 33: 코로나바이러스와 스타벅스 (2020년 6월 14일)

어제 오후 연희동 스타벅스에 친구를 만나려고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일, 이층 할 것 없이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여러 달째 싸우고 있는 정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가 2미터는 되어야 한다고, 정 안되면 1미터라도 떨어져 앉으라고 호소하지만, 스타벅스의 손님들 사이엔 거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이부터 중년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겨울 대중목욕탕처럼 붐비는 것을 보고 앉지 않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어린이와 60세 이하 연령층의 사망률이 낮다는 통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찾아오는 불행이 나에겐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은사망상(恩賜妄想) 때문일까요? 사망률이 아무리 낮아도 죽는 사람은 하나뿐인 생명을 잃는 것이고 ‘은사’에 대한 믿음은 말 그대로 ‘망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동행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