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7

노년일기 65: 노인의 기도 (2020년 12월 19일)

특정 종교의 신도는 아니어도 기도는 합니다. 몸은 나이들수록 무거워지고 기도는 나이들수록 길어지니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면 한참씩 그대로 머뭅니다. 기도가 나이들수록 길어지는 건 나이와 함께 자라는 사랑 때문이겠지요. 굶주림과 재앙, 불안으로 고통받는 존재들, 두려움, 외로움, 괴로움 속에서 자꾸 작아지는 사람들, 갖가지 결핍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고 싶지만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들... 기도가 필요한 곳이 도처에 있으니 노인의 기도는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기도합니다. 고통받는 존재들의 고통을 줄여주시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들의 두려움을 줄여주시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도와주소서. 지혜를 얻은 후에야 늙게 하시어 흰머리의 움직임 그대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의 이야기 2020.12.19

노년일기 64: 겨울 풍경 (2020년 12월 17일)

푸른 줄기와 잎, 그 잎 뒤꿈치에서 시작된 노랑이 꽃보다 어여뻐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지요. 철없는 어머니의 철 든 아들이 제 엄마 웃는 얼굴 보려고 주먹만 한 무 여덟 개 암말 않고 들어다 주었다지요. 어떤 무는 무색 동치미가 되고 어떤 무는 붉은 깍두기가 되었지만 무청은 장미처럼 거꾸로 말라갔다지요. 아들은 미소 띤 어머니 맞은편에서 흰밥에 깍두기를 먹고 어머니는 창밖 무청 친구 덕에 돌아가는 일을 생각했다지요. 모두 아무렇지 않았다지요.

나의 이야기 2020.12.17

노년일기 63: 자주 저지르는 실수 (2020년 12월 5일)

아버지, 어머니를 잃는 친구들이 늘어납니다. 친구들 나이가 60대, 70대이니 부모님들은 대개 90대이고 더러는 백수를 넘기신 분들도 계십니다. 저도 5년 전 아버지를 여의어 이제는 어머니를 뵐 수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가 기운다고 한탄하시지만, 저는 어머니가 그저 지금처럼 옆에 계셔주시길 기원합니다. 아흔을 넘긴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호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흔합니다. 환갑을 지나 부모를 잃었으니 무어 그리 슬프냐는 투로 상주를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삼십 대 친구들은 그런대로 삼가는 태도를 보이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 중엔 ‘그만큼 사셨으면 됐지’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나이가 많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그만큼 오래 되었다는 뜻이고,..

나의 이야기 2020.12.05

노년일기 62: 깻잎이 치매 예방에 좋은 이유 (2020년 11월 23일)

예전에도 깻잎을 좋아했지만 치매 예방에 좋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더 열심히 먹습니다. 날로 먹기도 하고 김치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부침개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어떻게 요리를 하더라도 깻잎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향기를 유지하는 깻잎의 속성이 치매 예방 효과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며칠 전 시장에서 세일 중인 깻잎을 만났습니다.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비닐봉지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 봉지에 핑크색 띠를 두른 깻잎 묶음이 열 개씩 담겨 있기에 한 봉지를 사들고 왔습니다. 찬물에 담가두었다 꺼내니 빛깔은 더 아름답게 짙어지고 향기는 여전했습니다. 한 장 한 장 사이마다 양념을 넣어 깻잎 김치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을 싫어한다는 ..

나의 이야기 2020.11.23

노년일기 61: ‘38점’짜리 바느질 (2020년 11월 14일)

가끔 바느질을 합니다. 가족들의 양말도 꿰매고 바지의 허리나 길이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긴팔 옷을 잘라 짧은 옷으로 만들기도 하고 원피스를 잘라 조끼를 만들기도 하는데 바느질을 하다 보면 언제나 중학교 때로 돌아갑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는 ‘수예’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바느질을 배운 다음 베갯잇에 수를 놓거나 액자나 병풍에 넣을 수예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예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바느질을 할 줄 알면 되지 수놓는 것까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가 불만이 많았습니다. 수예 선생님이 수예 재료를 사라고 하면 하는 수 없이 샀지만, 수업시간에 수놓는 흉내만 낼 뿐 완성한 작품이 드물었고, 한참 소설 읽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라..

나의 이야기 2020.11.14

노년일기 60: ‘노후’는 없다 (2020년 11월 11일)

초록색 상자에 든 ‘빼빼로’를 먹습니다. 11월 11일을 ‘빼빼로 데이’라고 하는가, ‘젓가락 데이’라고 하는가, 혹은 그냥 11월 11일로만 생각하는가.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사람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빼빼로 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엔 젊은이가 많고, ‘젓가락 데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엔 나이가 좀 든 사람이 많을 겁니다. '빼빼로 데이'는 오늘 날짜의 1111이 '빼빼로' 과자를 닮았으니 그 과자를 먹는 날로 하자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고, '젓가락 데이'는 1111이 젓가락을 닮았으니 이 날을 올바른 젓가락질을 홍보하는 날로 하자는 캠페인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그렇지만 두 명칭 모두에 무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무심하겠지요. 법적으로는 만 ..

나의 이야기 2020.11.11

노년일기 59: 어머니의 마지막 김장 (2020년 11월 8일)

어머니는 1930년 이른 봄에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친을 여읜 탓에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노동을 하며 자랐고 스물에 결혼해 다섯 남매를 낳았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딸들이 낳은 아들들이 또 아들딸들을 낳는 동안 어머니도 어머니의 삶도 많이 변했습니다. 늘 한방을 쓸 것 같던 남편은 오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딸들은 꿈속에서 비단옷 입은 아버지를 만났다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꿈속에서 남편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야속하고 서운하면서도 ‘살아생전에 내가 잘못해주어 내 꿈엔 안 오는가‘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어느새 아흔이 넘어 청력이 옛날 같지 않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살만합니다. 그러니 올 겨울 아픈 둘째딸네 김장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창 때는 백 포기, 이백 포기도 했으니 배..

나의 이야기 2020.11.08

노년일기 57: 부음, 갑작스런 (2020년 10월 25일)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존경하는 윤석남 선생님과 차와 담소를 나누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과 평소보다 늦은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 전화에서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누굴까 기대하며 전화를 여니 부음이었습니다. 나흘 전 아파트 동대표회의에서 만나 대화와 미소를 나눴던 아파트 소장님의 부음.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지며 숨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막 70세를 넘긴 건강한 분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가, 왜 그분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가, 의문과 탄식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지나서야, 댁에 화재가 발생했고 소장님이 불을 끄러 들어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갑자기 죽음을 맞은 소장님과, 화재를 당하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소장님까지 잃은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동행 2020.10.25

노년일기 56: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2020년 10월 22일)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실 때 가끔 모시고 가던 식당에 어머니와 둘째 동생과 갔습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배가 고팠습니다. 주요리가 나오기 전에 동생과 함께 푸성귀 반찬을 거의 다 먹어치웠습니다. 마침내 주요리가 나왔습니다. 이미 익혀 나온 주요리는 식지 않게 식탁 가운데 가스 불판에 놓였습니다. 즐겁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과식은 적(敵)인데 깜빡 잊은 것이지요. 동생과 어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통창이라 열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짐까지 챙겨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동생도 저와 비슷한 증세로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했고 구토를 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계속 메스꺼운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물약 소화제 한..

나의 이야기 2020.10.22

노년일기 55: 노인의 눈물 (2020년 10월 2일)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일어나면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머리를 빗은 후 기도 방석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포함해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이 다소나마 줄어들기를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지구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다 눈물 지을 때도 있고, 저보다 앞서 이곳의 주민으로 살다간 사람들의 자유와 평안을 기원하다가 눈물 흘릴 때도 있습니다. 오늘도 눈물이 찾아왔습니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 살아있는 값을 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애쓰는가, 어린 사람은 어린 값을 하느라, 젊은 사람은 젊은 값을 하느라, 늙은 사람은..

나의 이야기 2020.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