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855

그곳에 개울이 (2024년 5월 10일)

허만하 시인을 아는 것은 행운이고그의 시를 읽는 것은 축복입니다.아흔두 해를 꼭 채워 사신 선생은'詩의 눈'으로 자신의 안팎을 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 빚지고 있습니다.적어도 그분의 시를 읽는 동안엔우리도 언어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선생의 시집 41-42쪽에 수록된 '그곳에 개울이 있었다' 전문.시의 여백은 선생이 만드신 여백임.)  그곳에 개울이 있었다 뜻밖에그곳에 개울이 있었다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때  사라지는 것이 태어났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 어느덧 보이지 않는 소실점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이별과 출발 사이 손을 흔들며  그것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도 천체가 있고 해와 달이 돌고 있었다

오늘의 문장 2024.05.10

솔 벨로의 문장들 5: 좋은 남편 (2024년 1월 13일)

제가 9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아버지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밤중에 자신을 해치러 온 사람을 감복시켜 들고 온 칼을 두고 나가게 하신 '영웅'이니까요. 그런 아버지지만 상대하면 늘 지는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게 몰리면 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다들 내게 고개를 숙이는데. 저 조그만 여자만 나를 만만히 본단 말이야" 하시며 겸연쩍게 웃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좀 다정하게 굴 걸, 아버지를 좀 인정해 드릴 걸 하고 후회하신 적이 많았고, 이제는 병실에서 아버지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도 그렇지만, 부부란 일반적인 힘의 법칙이나 관계의 법칙을 적용할 ..

오늘의 문장 2024.01.13

솔 벨로의 문장들 4: 분노의 힘 (2024년 1월 5일)

시간이 투스텝으로 달아나는 아이 같습니다. 사위어가시는 어머니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차 문득 고개 들면 그새 2, 3일이 지나 있습니다. 요절한 가난한 선비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교육이라곤 일제 때 야학에 다닌 게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정의로웠고, 정의로운 분노를 망설임 없이 표출해 손해를 입은 적도 많았습니다. 바뀌어 가는 세상에서도 어머니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흔이 넘도록 신문을 보시며, 부정을 저질러 이익을 취하는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하시는가 하면, 윗사람이 성희롱이나 성 착취를 할 때 훗날의 피해나 불이익을 생각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맞서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근 94년 생애 동안 어머니의 정신을 지켜준 건 바로 그..

오늘의 문장 2024.01.05

노년일기 201: 역설적 십계명 (2023년 12월 24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오늘이 오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작은 책 을 읽다가 예수님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부분에서 정말 손바닥이 견딜 수 없이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가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니... 그분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흉내 내며 살았으면, 적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분을 흉내 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님은 켄트 키스(Kent M. Keith)의 저서 를 읽으시고 그 내용을 요약해 보내셨는데, 그 핵심은 '지도자를 ..

오늘의 문장 2023.12.24

솔 벨로의 문장들3: 노인이 생각하는 것 (2023년 12월 18일)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빠뜨리고 온 게 생각나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는 '아이쿠, 서두르다 빠뜨렸구나!' 생각하지만 노인은 '나이 때문이구나!'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다가 흘리거나 사레들어 고생할 때도 젊은이는 나이 생각을 하지 않지만, 늙은 사람은 나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거의 항상 쌓여가는 나이와 그 나이로 인해 가까워지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가까우니 손주를 돌보기보다는 친구들과 놀러 다녀야 하고, 죽음이 멀지 않으니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떠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율의 문제일 뿐, 죽음은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솔 벨로의 에서 주인공 토미 윌헬름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를 ..

오늘의 문장 2023.12.18

솔 벨로의 문장들2: 지금, 여기(2023년 12월 16일)

하늘은 우유 탄 물 빛깔이고, 지붕은 얇게 쌓인 눈으로 덮여 있고, 아스팔트 길은 녹은 눈 덕에 아름답게 검어서 세상은 한 폭 수묵화입니다. 문제 많은 눈이지만 이 눈 덕에 저 풍경을 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늘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건 일종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받는 것은 대개 많은 일, 특히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선을 바꾼 다음인 것 같습니다. 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무엇보다 그 책이 인생의 아이러니를 아주 잘 포착해내기 때문일 겁니다. 주인공 토미를 등치는 사기꾼이 분명한 탐킨 박사가 인생의 진실을 얘기하는 식이지요. PP. 61-62 I am at my most efficient when I don't need the fee. When I only lov..

오늘의 문장 2023.12.16

솔 벨로의 문장들1: 오늘을 잡아라 (2023년 12월 13일)

서머싯 몸의 에 이어 산책길 동행이 된 책은 솔 벨로 (Saul Bellow: 1915-2005)의 입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를 비롯해 네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희곡이 실려 있습니다. 산책길 동행이 될 만한 책들 중 이 책이 제일 크고 무거워 망설였지만, 이 단편소설의 첫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P. 7 "When it came to concealing his troubles, Tommy Wilhelm was not less capable than the next fellow. 토미 윌헬름은 골치아픈 상황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았다." 이 문장이 예고하는 대로,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토미는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에겐 상황의 호전을 ..

오늘의 문장 2023.12.13

서머싯 몸의 문장들5: 이방인 (2023년 12월 1일)

오늘은 룸메이트의 생일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마지막 미팅에서 만난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 파트너가 되었는데, 그가 지금의 룸메입니다. 인생은 'B-C-D'라는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Birth(태어남)-Choice(선택)-Death(죽음)'. 수십 년 전 룸메를 선택하여 함께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그가 이 사회의 방식에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태어난 이후 줄곧 한국에 살았으나 이곳은 늘 이방처럼 느껴지는데, 그 또한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민자들처럼 이 사회를 낯설어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부축합니다. 서머싯 몸의 에서 아래 문단이 눈길을 끈 이유입니다. P. 18..

오늘의 문장 2023.12.01

<달과 6펜스>와 폴 고갱 (2023년 11월 28일)

서머싯 몸의 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참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쉽게 이해되는 문장들이 있는가 하면, 잡힐 듯 잡히지 앉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이었습니댜. 대학 시절에 읽고 다시 읽는데 처음 보는 책 같았습니다. 이 책은 서머싯 몸이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주인공이 그림에 전념하겠다고 인생 항로를 바꾸고 타히티 등 남태평양의 섬에서 살다 죽는 것도 고갱을 닮았습니다. 를 읽고 난 후 영문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Paul_Gauguin)에서 폴 고갱을 찾..

오늘의 문장 2023.11.28

서머싯 몸의 문장들4: 운명 (2023년 11월 26일)

과학은 발달했지만 인류가 아직 답하지 못하는 오래된 질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중 하나는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인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겠다!' 하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며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아,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게' 라고 하는 걸 가끔 봅니다. 피하고 싶은 운명이 있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서머싯 몸은 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라'고 합니다. P. 129 We must go though life so inconspicuously that Fate does not notice us. And let us seek the love of simple, ignorant people. Their ign..

오늘의 문장 202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