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비는 행패를 부렸지만 서울의 비는
대지를 식혀 어제는 오랜만에 살 만했습니다.
회색 하늘 아래를 걸어 좋아하는 카페에 갔습니다.
더구나 어제 근무하는 바리스타는 기복 없이 늘 맛좋은
커피를 만듭니다.
저처럼 비를 반가워한 사람이 많았는지 카페엔
손님이 많았습니다. 비어 있는 테이블은 오직 하나.
왼쪽 작은 방에 이어져 놓인 4인석 테이블 두 개 중
안쪽 테이블엔 젊은 여성 넷이 앉아 있고 바깥 테이블만
비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잠깐
망설였지만, 제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걸 다행스러워 하며
웃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니 그냥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옆 테이블 여성 중 한 사람의 짐이 제 의자 옆 의자에
놓여 있었습니다. 빈 테이블의 빈 의자에 짐을 놓는 일은
흔하지만 누군가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짐을 치우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 손님은 치우지 않았습니다.
바리스타의 라테는 어제 날씨처럼 아름답고 맛있었습니다.
옆 테이블의 소음이 작은 방을 흔들었지만, 이런 날씨에
이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운 좋은 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쌓여 칸막이 노릇을 하는 책들 중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집을 꺼내어 펼쳤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은 <삼국지> 속 장비나 여포가 적을 섬멸하듯
소음을 끝장내니까요.
아, 그러나 셰익스피어도 옆 테이블 손님들을 어쩌진
못했습니다. 커피가 바닥나기 전에 저는 그들이 2000년
전후에 태어났으며, 함께 속초로 여행을 간다는 것, 그리고
띠와 사주 등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등...알고 싶지
않은 것을 제법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상하고
괴로웠던 건 그들이 그 작은 방의 여성 전용 화장실을
사용한 후 문을 닫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에 가장
가까운 자리엔 저와 합석한 남자 손님이 앉아 있었는데도.
패배한 셰익스피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오며
생각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이 운 나쁜 날이구나,
꼭 100년 전 스물넷 현진건은 이미 그것을 알았는데,
그때의 현진건 나이인 저 네 사람은 화장실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구나... 그들과 동시대인으로
살아야 하는 교양 있는 젊은이들은 참 괴롭겠구나...
가을바람에 귀를 씻으며 걷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운 좋은 날이구나,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저 하늘 아래 이 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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