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83

노년일기 100: 두 세계의 만남 (2022년 1월 9일)

만남 중에 쉬운 만남은 없습니다. 아니, 의미 있는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겠지요. 오늘 저녁 어머님아버님과 만나기 위한 준비도 며칠 전에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뵌 아버님, 한참씩 저희와 동거하신 어머님, 아버님은 룸메의 십대 중반 떠나시고 어머님은 2014년에 떠나셨습니다. 작년에 뵈었으니 꼭 일 년 만입니다. 적어도 9시부터는 두 분께 대접할 음식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사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두 분과 저희 가족이 상 앞에서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일 년 처음 하는 일을 하여 돈을 번 두 분의 손자가 제사 비용을 내주어 오늘 제사상엔 구경만 하고 산 적은 없었던 샤인머스캣도 올라갑니..

나의 이야기 2022.01.09

노년일기 99: 내일은 새날 (2021년 12월 31일)

연말은 늘 우울합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그런데 오늘 새벽 기도를 하다가 문득 웃었습니다. '내일은 새날'이라는 평범한 깨달음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쉬이 지치는 육체와 금세 흐트러지는 정신을 탓하며 그때, 자고 나면 바로 회복되던 시절에 좀 더 열심히 살지 그랬냐고 저를 꾸짖곤 했는데,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아흔에 타계하신 아버지나 백 번째 생신 지나 별세하신 어머님, 올해 아흔 셋이 되시는 어머니처럼 산다면 제게는 아직도 많은 '새날'들이 남아 있습니다. 부스러지는 육체와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태어날 때 지니고 왔으나 살며 잃어 버린 지혜와 현명을 다시 찾으려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그분들만큼 살지 못한다 해도, 그래..

나의 이야기 2021.12.31

노년일기 98: 무지 일기 (2021년 12월 29일)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온 걸까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안다는 말을 버려야 하네 하루도 빼지 않고 살았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삶은 학교가 아니네 지나간 날들이 그렇다면 오는 날들은 어떨까 오 년이 오면 십 년이 오면 무언가 알게 될까 무지가 빙하 같으니 정신은 새벽 버스 꼴 넉넉한 건 오직 겨울 해 얼리는 한숨뿐이네!

나의 이야기 2021.12.29

노년일기 97: 누구나 겪는 일 (2021년 12월 22일)

가끔 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픽 웃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을 혼자 겪는 것처럼 곱씹으며 슬퍼하거나 화 내는 걸 볼 때입니다. 감기부터 암까지 몸과 정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질병들, 시험 낙방, 투자 손해, 텅 빈 지갑, 행인을 넘어뜨리거나 놀래키는 보도블럭, 횡단보도를 침범해 들어온 자동차, 불친절한 식당 주인이나 마트 직원, 어깨에 뽕을 넣은 공무원, 직책이 요구하는 일은 잘못하면서 직책이 부여한 권한 이상을 휘두르는 사람,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상사, 친구인 척하지만 '친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남보다 나를 모르는 가족, 연애나 결혼 실패, 이별과 사별... 누구나 이런 일을 겪고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얕고 깊은 상처가 자리를 잡아 두고두고 괴롭습니다. 이 모..

나의 이야기 2021.12.22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2021년 12월 20일)

열흘이 지나면 2021년도 끝이 납니다. 어수선하게 시작된 한 해가 끝에 이르니 소란 또한 극치에 이른 것 같습니다. 엊그제 세상을 덮은 하얀 눈은 그 소란의 입을 막으려는 거대한 마스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벽 같은 겨울 아침, 컴컴하고 조용한 세상이 잠자는 아기처럼 사랑스럽습니다. 어두운 길의 끝,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가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놓고 을 펼칩니다. 번역문은 어색하지만 의미는 카페인을 타고 스며듭니다. 손바닥만 한 책, 겨우 132쪽인데 며칠 걸려 읽었습니다. 프랑스어 원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건지, 영어나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재차 읽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번역한 ..

나의 이야기 2021.12.20

아는 것의 힘 (2021년 12월 14일)

6시는 아침인데 밤처럼 캄캄합니다. 그래도 그 어둠 속으로 산책을 나서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어둠이 옅어지고 마침내 동쪽에서부터 밝은 빛이 솟아올라 어둠 전체를 지우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6시의 어둠을 응시하다 단테 (Dante Alighieri: 1265-1321)의 신곡 (The Divine Comedy)을 펼치니 하필 48쪽입니다. 텔레파시는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책 사이에도 존재하는 걸까요? "The time was the beginning of the morning; And the sun was climbing in compamy with those stars Which were with him when the divine love First set those ..

나의 이야기 2021.12.14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 (2021년 12월 12일)

겨울은, 무수한 잔인함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습니다.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생텍쥐페리의 에 나와 있습니다. 제 는 캐서린 우즈가 번역한 영역판으로 뉴욕 Harcourt, Brace and Company에서 나온 누렇게 변색된 책입니다. 그 책의 75쪽에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와 별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말하는 이유를 듣다 보면 눈이 젖곤 합니다. "The stars are beautiful, becaue of a flower that cannot be seen." "별들이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 때문이야." "What makes the desert beautiful," said the litt..

나의 이야기 2021.12.12

노년일기 96: 책 읽는 노인 (2021년 12월 9일)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오래 전에 졸업한 학교를 상기시킵니다. 십 대, 이십 대... 몸은 지금보다 나앗겠지만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 날이 드물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준 건 도서관의 친구들, 바로 책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취직이 되던 시절이라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텅 빈 도서관에 앉아 에머슨과 소로우를 읽으면 괴로운 실존과 피로한 현실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동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그런 위로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7퍼센트만이 대학에 간다고 했으니까요.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에 보탰다고 해도 대학에 다닌다는 건 선택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1.12.09

노년일기 95: 아름다운 지우개 (2021년 11월 18일)

산소는 무색, 무취라지만 산 사람은 유색, 유취입니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게 삶이니 삶에도 빛깔이 있고 냄새가 있습니다. 어떤 냄새는 코를 막게 하고 어떤 냄새는 숨을 들이쉬게 합니다. 어떤 냄새는 따뜻한 손 같고 어떤 냄새는 매질 같습니다. 담 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는 평화를 나릅니다. 제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여러 십년 쌓인 먼지 냄새? 붉고 푸른 감정의 재 냄새?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랑의 냄새? 나무 냄새가 나면 좋겠지만 잡식의 냄새가 나겠지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비만 오면 제 영혼이 제 몸을 끌고 나가는지 비, 아름다운 지우개!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악취를 씻어내는 지우개 같은 사람이 ...

나의 이야기 2021.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