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제 상관은 로버트 뱅크스 (Robert Banks)박사라는 문정관
(cultural attache)이고 그의 아내는 리즈 (Liz)였습니다.
기자 노릇 15년 후 7년간 칩거(?) 했는데 소위 IMF 사태
(금융위기)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주한 미국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대사관은 정부인데 저는 정부와 여러모로
다른 언론계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는 대사관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4년 3개월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뱅크스 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해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제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고, 기자생활만
한 까닭에 행정에 어두운 제게 행정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아이디어만 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함께 일한 지 삼년 여 만에 뱅크스 씨와 리즈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저도 떠났는데, 그때 제가 뱅크스 씨에게
드디어 대사관을 떠난다는 이메일을 보내자 그는
"Good for you, bad for USG"라고 답했습니다.
제게는 좋은 일이지만 미국 정부에는 나쁜 일이라는 뜻이지요.
그 후 한 번인가 한국에 온 뱅크스 씨, 아니 이제 상관이 아니고
친구이니 밥(Bob:로버트의 애칭)을 만났습니다. 그가 자신과
제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묶어 책으로 내자고 했을 때, 저는
별 생각 없이 물었습니다. "뭐 하러?" 그가 한국인들의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 하기에 영어 공부용 책은 이미
너무도 많다며 거절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밥이 책을 함께
내자고 했던 건 영어 공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구나 깨달았고, 그에게 매우
미안했습니다.
밥과 리즈를 보지 못하고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엊그제
리즈가 한국에 왔습니다. 밥은 남가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못 오고 코로나가 약해진 틈을 타 리즈만 온 것입니다.
리즈 덕에 광화문에 나가 보니 제가 알던 광화문이 아니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적선동 부근 유명한 삼계탕 집으로, 청와대로,
리즈와 밥이 함께 살던 옛날 한국일보 건너편 미국대사관 직원
컴파운드로, 인사동으로, 리즈와 저는 여행자가 되어 걸었습니다.
밥이 정해준 코스라고 했습니다. 테니스와 골프로 단련되어
탄탄하던 리즈는 몇 해 전 암과 싸운 끝에 좀 수척해졌지만
전과 다름 없이 유머러스했고, 우리는 아주 많이 웃었습니다.
리즈와 밥이 한국일보 건너편 미국대사관 직원 컴파운드에
있는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서울 시청에서
서류로 결혼한 후 나중에 하와이에 가서 정식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관 직원 컴파운드에는 저도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은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이젠 폐허 같은 풀밭에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만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음이 아팠습니다.
리즈는 '오징어 게임'을 몰랐지만 집에서 만든 달고나 등
사소한 선물 몇 가지를 건넨 후 헤어졌습니다. 한국에
며칠 더 있다가 결혼기념일에 맞춰 하와이로 간다고 했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부디 건강하기를,
밥과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안녕, 동갑내기 친구야!
Thank you, Liz, my fellow tourist.
Please be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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