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568

서머싯 몸의 문장들1: 작가 (2023년 11월 13일)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버릇이 있지만 산책길에 들고 나가는 책은 한 권입니다. 며칠 전까지는 존 스타인벡의 을 들고 나갔고, 이제는 서머싯 몸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를 들고 갑니다. 산책길 동행을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책이 가벼울 것. 둘째, 재미 있을 것. 몇 권의 후보들 중,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는 책을 고르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태어난 지 100년이 넘고 죽은 지 58년이 된 작가의 작품이지만, 위트 있는 문장들을 읽다 보면 지금, 바로 이 시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거겠지요. 11쪽에 나오는 '작가'에 관한 얘기가 특별히 마음에 와닿아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대와..

오늘의 문장 2023.11.13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5: 배움 (2023년 11월 8일)

초등학교 부근 카페에서는 학교에서의 하루를 끝낸 아이들이 학원에 가기 전 잠시 엄마들을 만나 간식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길들여진다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시키는' 공부를 오래 해야 한다면 참으로 괴로울 것 같습니다. 엄마들이 시키는 공부는 대개 영어입니다. 아이들은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문제집을 보며 빵을 먹고 주스를 마시지만, 어머니들의 눈은 스마트폰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질문하는 일이 드물고 어쩌다 질문을 해도 그 질문이 대화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어머니들이 바로 답을 말해주거나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야단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라는 걸 접했지만 영어는 지금까지도 제게 즐거움을 주고 생계를 돕는 동무입니다. 그러나 유치원 때부터 영어..

오늘의 문장 2023.11.08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4: 인간 (2023년 11월 2일)

제가 일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인 11월의 둘째 날 수십 년 동안 저를 위로해준 존 스타인벡의 을 다 읽었습니다. 전에도 읽었던 책인데 이번엔 더 재미있더니 마지막 쪽을 덮을 때는 왼쪽 가슴이 먹먹하며 아팠습니다. 인격보다 재산이 중시되는 세상에서 격조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는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타인벡은 1968년에 죽었고, 그때는 오늘날처럼 천박한 자본주의가 노골화하기도 전인데 이 뛰어난 작가는 이미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았던 것이겠지요. 이 그의 마지막 작품인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에 나오는 글로스터 공작의 대사에서 따온 것인데, 글로스터는 왕이 되며 리처드3세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한 스타인벡, 언젠가 다른 세상에서라도 만나 보고 싶..

오늘의 문장 2023.11.02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3: 돈 (2023년 10월 31일)

매달 끄트머리에 이르면 긴장하게 됩니다. 관리비와 공과금을 내야 하니까요. 내야 할 돈을 다 냈구나 휴~ 하는 순간 아차! 합니다. 우렁이가 김을 맨 스테비아 쌀을 보내주신 무안 최 선생님께 자장면 값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날을 돌아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행복하지만 꼭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돈'입니다. 그래도 '돈'만 많고 행복이 부족한 것보다는 나은 것 아닌가, 혼자 웃는데 '그래서 넌 그렇게 사는 거야!' 어머니의 탄식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우울해지려는 찰나, 오랜 친구 존 스타인벡의 낮은 목소리가 위로합니다. 역시 저는 운이 좋습니다. *최 선생님의 우렁이, 스테비아 쌀을 구입하고 싶으신 분은 연락 주십시오. 20킬로그램에 택배비 포함, 7만원입니다...

오늘의 문장 2023.10.31

정성의 온도 (2023년 10월 29일)

며칠 전 후배 덕에 처음 가보는 식당에 갔습니다. 편의점 2층에 있는 일식집은 평범해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빈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후배가 예약을 해둔 덕에 간신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점심코스가 1인당 5만 원이나 한다는데 이렇게 붐비다니... 이 나라에 부자가 많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음식이 나왔습니다. 음식의 온도가 완벽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뜨거워야 할 음식이 뜨겁게 나오고 차가워야 할 음식이 차갑게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요즘은 당연한 것을 해내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을 나설 때 주인인 듯한 여자분이 "맛있게 드셨어요?" 물었습니다. "네, 온도가 완벽해서 참 좋았어요. 셰프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하고 답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기뻐하더니 저를 계단 아래 길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

동행 2023.10.29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2: 전쟁 (2023년 10월 26일)

국화와 코스모스가 계절을 장식하는데 뉴스엔 연일 전쟁 소식입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잃고 누군가는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고 훈장을 받겠지요. 이스라엘과 하마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말 이 전쟁들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시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에 나오는 문장들입니다. P. 50 They say a good soldier fights a battle, never a war. That's for civilians. 진짜 군인은 전투를 할 뿐, 전쟁을 하는 법이 없다지. 전쟁은 민간인들이 하는 거니까. P. 109 "Do you remember my decorations?" "Your medals from the war?" "They were ..

오늘의 문장 2023.10.26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1: 바보 (2023년 10월 23일)

대학 시절의 괴로움이 아르바이트였다면 즐거움은 도서관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은 이 나라가 우후죽순처럼 성장하던 때라 대학을 졸업만 하면 취직이 되었습니다. 호황 덕에 텅 빈 도서관은 아주 소수의 차지였고 그들 중에 저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를 여럿 만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위로를 주는 사람은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 1902-1968) 입니다. 물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는 66년을 살며 이렇게 큰 위로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를 넘겨 사는 저는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여러 가지 처음 겪는 일이 많았던 지난 10개월, 힘들 때도 있었지만 스타인벡 덕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스타인벡에게 위로받듯 제 문장들에 위로받으며 힘든 시기를 지나는 사람이 한..

오늘의 문장 2023.10.23

가을비 (2023년 10월 19일)

오랜만에 찾은 단골 카페 마당에서 수국들이 시들고 있었습니다. 대추를 떠나보낸 대추나무도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맞은편 장애인 주간 보호시설의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압니다. 앞마당을 붉게 물들이던 수국들과 데일 듯 뜨거운 여름 햇살에 오히려 빛으로 맞서던 대추나무 잎들, 주차장을 넘어 인도까지 넘나들던 장애인 시설의 자동차들을... 보이는 것은 늘 변하지만 진실은 그 변화 너머에 있는 것... 자박자박 문밖을 거니는 가을비, 시들던 수국과 기운 없는 대추나무를 반짝반짝 씻어 주겠지요. 주차장 바닥도 쌓인 먼지를 벗고 말개질 겁니다. 자박자박 비의 발소리를 들으며 시간처럼 진한 커피 마시고 싶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3.10.19

어느 날의 노트: 입안에 말이 적고 (2023년 10월 15일)

방안 정리를 시작했는데 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 있는 책을 저쪽으로 옮기고 어쩌고 하며 책꽂이 한 칸을 간신히 비우고 나면 머리가 아파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버릴 책을 버리자고 시작한 일인데 버릴 책은 찾지 못하고 메모 쪽지 두어 장 버리는 게 고작입니다.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메모지중에 한 장이 손에 들어옵니다. 법정 스님의 책 의 78쪽과 79쪽에서 옮겨 적은 글입니다.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하루 일과를 대충 마치고 나면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다. 이 산중에는 믿음직한 몇몇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청랭한 개울 물소리를 ..

동행 2023.10.15

다시 9월이 가는 소리 (2023년 9월 30일)

추석 연휴와 함께 9월이 떠나갑니다. 귀향하는 사람들, 귀경하는 사람들,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 파란 하늘의 흰구름과 회색 구름... 그 모든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9월이 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부디 즐거운 만남이기를, 부디 다음이 있는 헤어짐이기를 기원하며 5년 전 이맘때 서울시 '50플러스 포털'에 연재하던 '김흥숙의 시와 함께'에 썼던 '구월이 가는 소리'를 사진은 빼고 다시 옮겨둡니다. [시와 함께 5] 구월이 가는 소리 혹독한 여름 끝 구월이 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구월이 떠나갑니다. 여름 절반 가을 절반, 이번 구월은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여을’이었다고 할까요? 언젠가 구월을 기다리며 듣던 노래를 구월 막바지에 듣습니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

동행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