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568

봄 매화, 우리 엄마 (2024년 2월 12일)

어제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하셨습니다. 숨소리가 자꾸 거칠어져 옆 병상의 환자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1인실로 가려 했으나 1인실이 동나고 없었습니다. 1월 5일에 입원하셨으니 37일만입니다. 병실에서는 링거로 영양과 물을 공급받았지만 이제 그러지 못하시니 언제 아버지의 곁으로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2008년 1월 한겨레21의 청탁으로 어머니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겨레21의 696호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를 아래에 옮겨둡니다. 원래 기사보다 짧은데, 2020년 5월에 '최종 수정'하며 인터넷판에 맞게 줄인 것 같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아름다운 저희 어머니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

나의 이야기 2024.02.12

천리향 (2024년 2월 10일)

병실을 가득 채운 공기는 다른 어느 곳의 공기와도 다릅니다. 고통의 냄새라고 하기엔 너무 뭉근하고 오래 전 할머니 내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대적이고... 낯익고도 낯선 그 공기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알 수 없는 피로가 업습합니다.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은 마음을 떨치려면 베란다로 나가야 합니다. 나가는 순간, 종일 운동화에 갇혀 뜨거워진 발과 무거운 다리부터 축 처진 어깨, 자꾸 아래로 향하는 눈꺼풀까지 봄비 맞고 일어서는 풀처럼 삽상하게 살아납니다. 초라한 플라스틱 화분에서 앙상하게 자란 천리향의 향기 덕입니다. 베란다를 채우고 있던 서늘하고 오묘한 향기가 눈물이 핑 돌게 반갑습니다. 보아 주는 이 드문 겨울 베란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노력하여 향기 세상을 만든 걸까요? 천리향 같은 ..

나의 이야기 2024.02.10

파리 대왕 (2024년 2월 3일)

어머니의 병실에 드나들며 다시 한 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병실이나 대합실처럼 제한된 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적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토막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시간에 잠깐씩 보았지만 그새 손바닥만한 책 두 권을 다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은 입니다. 언젠가 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땐 '파리'가 프랑스 파리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의 '파리'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 파리라는 걸 알고 적잖이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11-1993)이 1954년에 발표한 첫 소설로, 전쟁 대피 중에 고립된 섬에 추락한 비행기에 함께 탔던 소년들이 섬에서 자기들끼리 사회를 이루..

동행 2024.02.03

한국의 '호빗들' (2024년 1월 31일)

'호빗(Hobbits)'은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톨킨(J.R.R. Tolkien)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키의 절반쯤 되는 키에 맨발로 다니는데, 인류 종족 중 하나이거나 인류의 가까운 친척으로 묘사됩니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속 호빗들은 단순 소박한 삶을 영위하지만, 그들의 세상인 '가운데 땅: 중간계 (The Middle Earth)'가 위험에 처할 때는 온 힘을 다해 싸웁니다. 그 호빗들이 지금 한국에도 있습니다. 아늑한 지하굴에 사는 톨킨의 호빗들과 달리 한국의 호빗들은 병실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를 집 삼아 방삼아 생활합니다. 그들은 톨킨의 호빗들처럼 눈에 띄는 차림으로 병실을 오가는 간병인 아주머니들입니다..

동행 2024.01.31

동신병원 '은탁 선생' (2024년 1월 28일)

룸메이트는 TV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지만 SBS에서 시즌3까지 방영했던 '낭만닥터 김사부'의 열렬한 팬입니다. 그가 그 드라마에 빠져든 건 그 드라마가 얘기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관에 부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터에선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실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 바탕엔 인간, 특히 약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머니가 20일 넘게 누워 계신 동신병원은 '남만닥터 김사부'가 일하는 '돌담병원'과 많이 다를 겁니다. 돌담은 드라마 속에 있고, 동신은 서대문구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 동신병원에서 돌담병원 '은탁 선생'처럼 멋진 간호사를 발견했습니다. 제 시력이 워낙 나빠 그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보진 못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은탁 선생'입니다. 가끔 마..

동행 2024.01.28

빙판 (2024년 1월 19일)

며칠 전 어머니 계신 병원에서 오빠 내외를 만났습니다. 오빠가 넘어져 오른손 뼈에 금이 갔다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 네다섯 번이나 깁스를 했던 제겐 못 미치지만 오빠의 깁스가 처음은 아닙니다.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 덕에 다시 만난 2012년 12월 16일 자 ‘빙판’이라는 제목의 글에도 오빠가 오른팔에 깁스를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그 글.. 거울 보듯 보고 나서 조금 줄여 옮겨 둡니다. 그 글의 전문을 읽고 싶으신 분은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https://futureishere.tistory.com/953 ----------------------------------------- '빙판' 하면 누구나 추운 겨울을 생각하지만 삶의 골목 골목엔 빙판처럼 우리를 시험하는 곳들이 늘 있습니다. 때로는 ..

동행 2024.01.19

솔 벨로의 문장들 5: 좋은 남편 (2024년 1월 13일)

제가 9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아버지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밤중에 자신을 해치러 온 사람을 감복시켜 들고 온 칼을 두고 나가게 하신 '영웅'이니까요. 그런 아버지지만 상대하면 늘 지는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에게 몰리면 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다들 내게 고개를 숙이는데. 저 조그만 여자만 나를 만만히 본단 말이야" 하시며 겸연쩍게 웃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좀 다정하게 굴 걸, 아버지를 좀 인정해 드릴 걸 하고 후회하신 적이 많았고, 이제는 병실에서 아버지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도 그렇지만, 부부란 일반적인 힘의 법칙이나 관계의 법칙을 적용할 ..

오늘의 문장 2024.01.13

이영애 씨에게 (2024년 1월 9일)

저는 배우 이영애 씨를 좋아합니다. 그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름에 걸맞게 처신합니다. 이 나라에 이영애 씨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엔 세 분의 고령 환자들이 계십니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한 분들입니다. 오후 세 시가 되도록 어머니 곁에 붙어 있다 잠시 병실 근처 휴게 공간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데, '아퍼? 어디가 아퍼!' 잘못한 아이를 야단치는 듯한 큰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병실로 달려가니 4, 50대로 보이는 간호사가 젊은 동료를 옆에 두고 아흔넷 어머니에게 반말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청력이 나빠 못 들으실까봐 큰소리쳤겠지 하고 이해한다 해도 반말은 용서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엔 기가 막혀 명찰을 볼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

동행 2024.01.09

솔 벨로의 문장들 4: 분노의 힘 (2024년 1월 5일)

시간이 투스텝으로 달아나는 아이 같습니다. 사위어가시는 어머니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차 문득 고개 들면 그새 2, 3일이 지나 있습니다. 요절한 가난한 선비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교육이라곤 일제 때 야학에 다닌 게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정의로웠고, 정의로운 분노를 망설임 없이 표출해 손해를 입은 적도 많았습니다. 바뀌어 가는 세상에서도 어머니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흔이 넘도록 신문을 보시며, 부정을 저질러 이익을 취하는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하시는가 하면, 윗사람이 성희롱이나 성 착취를 할 때 훗날의 피해나 불이익을 생각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맞서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근 94년 생애 동안 어머니의 정신을 지켜준 건 바로 그..

오늘의 문장 2024.01.05

솔 벨로의 문장들3: 노인이 생각하는 것 (2023년 12월 18일)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빠뜨리고 온 게 생각나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는 '아이쿠, 서두르다 빠뜨렸구나!' 생각하지만 노인은 '나이 때문이구나!'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다가 흘리거나 사레들어 고생할 때도 젊은이는 나이 생각을 하지 않지만, 늙은 사람은 나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거의 항상 쌓여가는 나이와 그 나이로 인해 가까워지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가까우니 손주를 돌보기보다는 친구들과 놀러 다녀야 하고, 죽음이 멀지 않으니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떠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율의 문제일 뿐, 죽음은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솔 벨로의 에서 주인공 토미 윌헬름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를 ..

오늘의 문장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