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기형도의 '10월' (2020년 10월 8일)

divicom 2020. 10. 8. 14:54

10월이 오면 생각 나는 시가 두 편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월'과,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10월'입니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시적(詩的)인 10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서 발견한

기형도 시인의 시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10월 - 기형도

 illustpoet  2019. 10.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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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연필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0월에 접어들었나 싶었는데 갑작스레 쌀쌀한 기운에 가디건을 걸치고 아침 준비를 한다.

며칠 전, 간단한 검진을 받느라 들른 병원에서 대기중에 집어든 패션잡지를 뒤적이다 기형도 시인을 추모하는 특집기사를 보았다. 후배시인들, 작가들의 추억담과 그의 시를 시각화한 사진들이 실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시집을 펼쳐보며 나와 같은 출생연도의 시인의 작품은 긴 생을 산 사람의 호흡이 담겨 있어 영혼이 소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짦은 생과는 달리 그의 시는 오래오래 살아남아 낙엽 태우는 향을 닮은 그의 시는 우리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