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밥벌이 현장에서 과로로,혹은 과로로 인한 절망으로 야기된 죽음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이고 인류학자이며 철학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1886년에 태어나 1964년 캐나다에서 숨진 폴라니가
1944년에 세계에 선물한 죽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소환하며,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처참하게 부정해버리는 시장 자본주의의 더욱 포괄적인
인간 파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https://www.ecommons.or.kr/series/Review/post/27 인용)
오늘 경향신문에도 이중근 논설실장이 폴라니를 소환한 글이 실렸습니다.
이 실장에게 감사하며 옮겨둡니다.
[이중근 칼럼]100년 전 칼 폴라니의 월급 사용법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1909~2005)의 자서전에 그가 경제사회학자 칼 폴라니(1886~1964)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드러커가 김나지움을 막 졸업한 1927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당시 유럽의 명성 있는 경제잡지 ‘오스트리아 경제’에 기고한 것을 계기로 편집진이 청년 드러커를 신년 특집호 제작회의에 초대했는데, 부편집장이 폴라니였다. 드러커가 회의 후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다고 하자 폴라니는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폴라니의 집은 빈 시내에서 멀었다. 빈민가 종점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그 종점에서 다시 전차를 갈아탄 뒤 공장과 창고가 늘어선 지대를 지나 또 다른 종점에서 내리고 다시 20분간을 더 걸어가서야 당도했다. 쓰러질 것 같은 판잣집들과 쓰레기 더미에 둘러싸인 허름한 5층 집이었다. 껍질을 대충 벗긴 설익은 감자가 크리스마스 만찬의 전부였다. 하지만 드러커 ‘생애 최악의 식사’도 그를 놀라게 하기엔 일렀다. 폴라니와 부인, 장모 그리고 외동딸 등 네 가족이 다음달 생활비를 어떻게 벌 것인지를 놓고 벌인 논쟁에 그는 귀를 의심했다. 그날 낮 폴라니가 월급으로 거액의 수표를 받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다 못해 드러커가 “박사님 월급으로 생활비는 충분하지 않나요?”라며 끼어들었다.
이중근 논설실장
순간 네 사람 모두 말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곤 합창하듯 동시에 말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로군요. 월급을 자신을 위해 쓰다니! 우리는 그런 소린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요.” 그러자 폴라니의 부인 일로나가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논리적인 사람들이죠. 빈은 헝가리 난민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칼은 돈을 벌 수 있어요. 그러니 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피터 드러커 자서전 인용)
이 대목에서 드러커는 감동이나 충격, 존경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18세 청년 드러커가 폴라니와 가족을 향해 느꼈을 감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훗날 20세기의 지성으로 불린 드러커의 삶에 이 만남이 끼쳤을 영향을 유추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이 편법적으로 사익을 챙기다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존경받았던 전직 대통령의 아들은 국회의원이 되면서 재산을 숨기다 들키자 편법으로 증여했다. 야당 국회의원은 국회 관련 상임위에서 터줏대감으로 활동하며 자기 친족회사에 건설공사가 가도록 힘을 썼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거주하지도 않을 세종시에서 특별분양을 받아 거액을 챙긴 공직자들도 있다. 앞에서는 정의와 도덕을 말하면서 뒤론 차곡차곡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고도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 지식을 자신들의 비위를 변명하고 가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100년 전 폴라니가 주목한 불평등 구조와 자본주의의 폐해는 여전하다. 가진 사람들의 돈과 권력 향유는 오히려 더욱 교묘해지고, 그 틈에서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고 있다. 정의와 공정에 목마른 젊은이들의 불만은 분출할 출구만 찾고 있다. 시대가 변해도 불평등을 해소하는 접근은 다를 수 없다. 제도를 고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솔선수범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 부동산 정책이 딱 그렇다. 투기 공직자들이 기획하고 법을 통과시킨 위선적인 정책이 눈 밝은 시민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그동안 수차례 내놓은 정책에 ‘영끌’과 ‘빚투’에 몰린 젊은이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시대의 어느 누구도 폴라니와 그의 가족처럼 사회 변혁에 온전히 삶을 바칠 수는 없다. 폴라니처럼 허름한 집에 살면서 월급까지 통째로 내놓는다면 가식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작금 시민들이 공직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폴라니와 같은 특별한 희생이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 응답하라는 것뿐이다. 여기서 지난 7년 동안 국회에서 썩고 있는 이해충돌방지법을 주목한다. 속칭 김영란법을 통과시킬 때 국회의원들만 대상에서 쏙 빠져나와 누리던 그 특권을 이제 폐지할 때가 되었다. 여야 모두 약속한 대로 이 법을 정기국회에서 꼭 통과시켜야 한다. 희생하라는 게 아니라 그동안 누려온 것을 내려놓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이다. 폴라니를 100분의 1이라도 따라 한다면 이번엔 가능하지 않을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10300045&code=990100#csidxbe81a2e39a713a18746f9aca767f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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