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9

책을 읽는 이유 (2020년 10월 18일)

사람이 만들어낸 물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비누? 페니실린? 목걸이? 컴퓨터? 저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기기 시대에 책을 누가 보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시간이 흐를수록 책의 존재에 감사하게 됩니다. 비록 초고도근시이지만 아직 책을 볼 수 있으니 그것도 감사합니다. 책 중엔 아예 보지 않는 책이 있고, 쓱 한 번 보는 책이 있고, 두고두고 보는 책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의 책은 대개 이름만 책일 뿐 책이라 할 수 없는 종이묶음입니다. 저자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책, 시류에 편승해 돈 벌려고 만든 책이거나, 그냥 지식인인 체 하기 위해 만든 책이지요. 한 번 쓱 보고 마는 책들도 첫 번째 유형의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적 문장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여기저기 ..

나의 이야기 2020.10.18

어떤 풍경1 (2020년 10월 12일)

베이커리카페의 5인용 남색 소파에 바랜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노인이 홀로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봅니다. 음료도 없이 빵도 없이 한참 들여다보다가 창가의 1인 석으로 옮겨 앉습니다. 노인이 앉았던 소파에 그이 나이의 십분의 일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가 털썩 통통한 몸을 앉힙니다. 노란 색 티셔츠는 새 것이어도 표정은 조금 전 노인을 닮았습니다. 음료도 없이 빵도 없이 아이도 홀로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봅니다. 웃음이 납니다.

동행 2020.10.12

기형도의 '10월' (2020년 10월 8일)

10월이 오면 생각 나는 시가 두 편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월'과,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10월'입니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시적(詩的)인 10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서 발견한 기형도 시인의 시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10월 - 기형도 illustpoet ・ 2019. 10. 10. 20:18 URL 복사 이웃추가 종이에 연필 ​ ​ ​ ​ ​ ​ ​ ​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오늘의 문장 2020.10.08

연필의 꿈, 돈의 꿈(2020년 10월 5일)

연필을 깎습니다. 선물 받은 연필의 겉옷은 잉크 빛인데 그 옷을 벗기니 흰색과 빨간 색 속옷이 드러납니다. 그 속옷 아래엔 나무 속살이 있고, 그 속살은 검은 심을 싸고 있습니다. 심이 쓱쓱 미끄러지며 글자가 태어납니다, 시 시 시... 글 글 글... 연필을 깎을 때면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시를 쓰고 싶다, 누군가를 살리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저는 여전히 같은 꿈을 꿉니다. 아마도 그 꿈은 제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 이루어지지 않는 꿈 덕에 저는 계속 연필을 깎을 겁니다. 시시때때로 ‘너는 왜 그렇게 사니?’ 핀잔을 들을 거고 저는 유쾌할 겁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건 매일 절망과 마주서는 일이지만 바로 ..

나의 이야기 2020.10.05

자식은 스승 (2020년 9월 25일)

어제 오후 동네 마트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트 조금 못 미쳐 놀이터가 있는데 마트와 놀이터 사이의 찻길을 따라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 차들 중 한 대가 왕~왕~~ 반복적으로 울어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차를 건드렸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머리가 아팠습니다. 차에 무슨 일이 있나 보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리며 어린 여자아이 셋이 튀어나왔습니다. 다섯 살부터 일곱 살쯤 연년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모두 겁에 질려 있었는데 특히 둘째가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큰아이가 두 동생에게 “엄마한테 가자!”고 하더니 셋이 함께 죽어라고 내달렸습니다. 마트 문을 들어서자 계산대 앞에 줄 서 있는 엄마와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둘째 아이는 여전히 울고 나머지 두..

동행 2020.09.25

한국 의사, 독일 의사 (2020년 9월 17일)

오늘 아침 신문에서 한국과 독일의 의사들과 두 나라의 의료체계를 비교한 칼럼을 보았습니다. 이 나라에는 '돈 잘 버는' 직업이라 의사가 되는 사람이 많지만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고 싶어 의사가 된 사람도 많을 겁니다. 아래 칼럼이 그 진짜 의사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길 바랍니다. 의료는 공공재여야 한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의사파업 봉합 직후 들려온 독일 의사들의 소식은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였다. 독일은 우리나라보다 인구당 의사 수가 2배 가까이 많은데도 의회에서 의대 입학 정원 50% 확대 추진을 밝혔다. 쟁점은 같지만 독일 의사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의료 인력 확대를 요구해 온 독일 의료계는 이 방안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동행 2020.09.17

의사고시에 대한 이재명 지사 의견, 동의함 (2020년 9월 12일)

의사 자격 국가고시를 거부한 의과대학 학생들의 '구제' 운운하는 얘기를 들으면 쓴웃음이 나옵니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의사가 아닙니다. 아직 의사가 되기 전인 학생들이 의사들의 이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의사들이 벌이는 행동에 동조하느라 국가고시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의사들과 정부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의과대학생들에게 다시 국가고시를 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얘기를 의대 교수들이 하고 있습니다. 교수라는 사람들이 이러니 그들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이 사안에 대해 한 얘기를 연합뉴스에서 읽었습니다. 동의합니다! ------------------------------------------------------ 이재명 "의사고시 거부 의대생 구제, 원..

동행 2020.09.12

최고의 버스기사 (2020년 9월 11일)

신문은 하루 지나면 신문지가 됩니다. 어떤 기사는 신문지와 함께 쓰레기가 되고 어떤 기사는 역사가 되거나 독자의 기억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최고의 버스기사'라는 제목의 칼럼은 며칠 전에 보았는데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아래에 옮겨둡니다. 글을 쓴 하수정 씨가 271번 버스 기사가 상을 받으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니 언젠가 제가 한국일보에 272번 버스의 친절한 기사 나원일 씨에 대해 썼던 게 떠오릅니다. 나원일 씨는 여전히 272 버스에서 일하고 있을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동칼럼]최고의 버스기사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우리말로 치면 ‘중용’쯤 되는 ‘라곰’을 사회 규범으로 여기는 스웨덴은 ‘최고’나 ‘1등’에 별 집착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스웨덴에 이례적으로 ‘최고’를 뽑는 대회가 있다. 바로..

동행 2020.09.11

'아멘!' 그리고 '아기 폐하' (2020년 9월 7일)

요즘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일부 교회'들을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목사들 때문이 아니고 그 목사들을 신봉하는 신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생각...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참 잘 써주었기에 감사하며 아래에 옮겨둡니다. [신형철의 뉘앙스]‘아기 폐하’의 위험한 운전 신형철 문학평론가 일부 교회가 성경적 근거도 없이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反)정부’를 실천하려는 것도 헌금 수납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목사님들에게 거울이 필요해서는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두 배 더 크게 비춰주는 여자라는 거울 덕분에 최악의 순간에도 자기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냉소했다. 어떤 목사들은 신도라는 거울 앞에서, 두 배가 아니라 신만큼이나 거대해진 ..

오늘의 문장 2020.09.07

‘의사(醫師)’ 말고 ‘의사(醫事)’ (2020년 9월 3일)

어린 시절엔 ‘빨간약’이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 넘어지면 얼른 집으로 달려가 ‘빨간약’을 가져다 발라주었습니다. 일찍부터 허리가 아프셨던 아버지는 허리를 주무르는 세 딸의 손 중에서 제 손이 제일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이었을까요? 공부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제가 고3이 되자 아버지는 의대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형편인지라 국립대에 가야 했지만 제 성적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서울대학교는 전 과목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 과목이 아닌 선택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그래도 시험은 보고 싶었습니다. 시험을 치지 않은 걸 두고두고..

동행 202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