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의사(醫師)’ 말고 ‘의사(醫事)’ (2020년 9월 3일)

divicom 2020. 9. 3. 11:26

어린 시절엔 ‘빨간약’이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 넘어지면 얼른 집으로 달려가

‘빨간약’을 가져다 발라주었습니다.

 

일찍부터 허리가 아프셨던 아버지는 허리를 주무르는

세 딸의 손 중에서 제 손이 제일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이었을까요? 공부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제가

고3이 되자 아버지는 의대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형편인지라 국립대에 가야 했지만

제 성적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서울대학교는 전 과목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 과목이 아닌 선택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그래도 시험은 보고 싶었습니다. 시험을 치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하기보다는 시험에 실패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 커트라인이 서울대 모든 학과 중

가장 낮으니 간호학과에 응시하기로 했습니다. 혹시라도

붙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의예과로 전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수학은 0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진 않았습니다. 덕택에 일 년 동안 집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어머니의 설거지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서운하셨겠지만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너, 의대 안 가길 잘했다”고 하시는 일이

잦았습니다. “안 간 게 아니고 못간 건데요” 하면,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라는 투로 웃으셨습니다.

 

처음엔 제가 타고난 약골이라 의대 공부가 힘에 부칠 테니

안 가길 잘했다고 하셨는데, 나중엔 의대 가는 사람들 중에

사람을 살리러 가는 사람은 드물고 부자 되려고 가는 사람은

많으니 안 가길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소수에 속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아셨으니까요.

 

요즘 병원 밖에서 시위하는 의사들을 보면서 병원 안의

‘소수’를 생각합니다.

‘의사 선생님’보다 ‘의사 사장님’이 많다고도 합니다.

그 소수의 선생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이제 ‘의사’의 ‘사’가 ‘스승 師’이던 시대는 갔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아침 신문에서 같은 생각을 읽었습니다.

 

[여적]스승 ‘사’자의 일탈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전문직·기술직 뒤에 가장 많이 붙는 ‘사’자는 한자로 4개(士·師·事·使)가 있다. 선비 사(士)는 직업을 존중하는 뜻으로 가장 널리 쓰인다. 학위(학사·박사), 기술직(운전사·조종사·항해사·속기사·촬영사), 면허전문직(변호사·변리사·법무사·공인중개사·검안사·감정사), 보통 특정 분야 뒤에 붙는 상담사·지도사, 힘이 센 역사나 군사, 학예사·악사·바둑기사에도 사(士)자가 붙는다.

 

검사·판사는 일 사(事)를 쓴다. 조선시대 중죄인을 신문한 의금부도사도 이 글자를 썼다. 변호사(士)를 빼고 죄를 다루는 공공 영역엔 두루 일 사를 쓴 셈이다. 외교관 중 영사와 도지사, 집안일을 돌보거나 교회 직분인 집사도 사(事)자가 붙는다. 보낼 사(使)는 외교관인 대사·공사, 현재 도지사 격인 조선시대 관찰사, 이순신 장군도 맡은 삼도수군통제사까지 파견직 벼슬아치에 붙인다. 연산군 때 조정에서 예쁜 여자를 뽑으려고 전국에 보낸 채홍사도 사(使)자를 썼다.

 

교사·강사에 쓰는 스승 사(師)는 오랜 수련을 거치거나 전문적인 일에 주로 쓰인다. 국어사전에 침술사(師)는 ‘침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침술사(士)는 ‘침 놓는 자격증을 딴 사람’으로 분류돼 있다. 요리사·제방사·세공사·조율사에 스승 사가 붙고, 안마사와 함께 세신사도 사(師)자를 쓴다. 칼 쓰는 검사(劍士)와 활 쏘는 궁사(弓師)의 한자를 달리한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사(師)자를 붙이는 게 의사·수의사·약사, 목사와 전도사이다.

 

고교 시절 윤리선생님이 ‘왜 의사·목사에게 스승 사자를 붙이는지’ 묻고, ‘생명을 다루고 공동체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이어서’라고 풀이했다. 의사는 신체의 생명을, 목사는 영혼의 생명을 지켜준다고 했다.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 더 묻지 않았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이라고 부를 때였다. 그랬던 스승 사자 기억이 바랜 것은 코로나19 난리 속에 “바이러스 테러를 당했다”는 전광훈 목사나 방역당국에 거짓말하고 대면예배만 고집하는 여러 목사들을 보면서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도외시하고 장기파업 중인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공동체를 흔드는 두 스승 사자 직업의 일탈이 씁쓸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21958005&code=990201#csidx2da978f9ebbfcb49d031276801492f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