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123: 사랑의 수명 (2022년 6월 5일)

divicom 2022. 6. 5. 17:45

아흔둘과 아흔셋 사이를 걷고 계신 어머니와 점심을 먹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나니 "여보세요?" 낯익은

음성이 들립니다. 반가움과 함께 슬픔이 밀려듭니다.

언젠가 이 번호에 전화를 걸어도 이 목소리가 안 들릴 때가 올 겁니다.

 

어머니 댁으로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태우고 식당으로 갑니다.

연희동의 중국식당을 고르신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길에 바뀝니다.

"저기, 저 까만 건물에 있는 식당에 가자!" 고 하십니다.

늘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이 길다는데 오늘은 줄이 없습니다.

"일요일엔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묵묵부답이신 걸 보니 보청기를

끼셨어도 들리지 않나 봅니다. 차에서 내려 입구로 가니

문이 잠겨 있습니다. 차는 이미 떠났으니 주변의 식당을 찾아 봐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새로운 식당의 새로운 음식을 좋아하십니다.

처음 가보는 스페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멀지 않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십니다. "그 집이 문을 닫아서 더 잘됐어. 안 먹어본 것도

먹어보고." 어머니의 명랑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커피를 마시던 어머니가 사진 세 장을 꺼내십니다.

칠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남기신 상자에서 발견했다고 심상하게

말씀하시지만, 어머니 가슴 속에 일렁일 그리움을 저는 잘 압니다.

저 또한 여전히, 매일, 아버지를 생각하니까요.

 

어떤 사진은 아이가 어렸을 적 제가 아이를 안고 어머니와 찍은 것이고,

어떤 사진은 아이가 더 어린 사촌동생을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찍은 것입니다.

사진은 흐른 시간 만큼 바랬지만 사진을 채운 사랑은 여전합니다.  

 

문득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몇 구절이 떠오릅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의 생략을 뜻합니다.

 

229-230쪽:

"우리의 사랑은 반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그이가 백 살로 죽은 지 8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내 쪽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고, 그이 쪽도 그렇다고

믿는다... 쇼쇼니족의 의사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정말로 죽은 것이라면, 왜

그 사람이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걸어다니겠는가?' 스코트는 내 삶의 큰 부분

속에, 영원히 현재 상태로 남아 있다... 나는 스코트가 죽은 뒤에도 그이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나는 죽은 뒤의 삶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의 사랑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