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 12

노년일기 168: 나의 전생 (2023년 5월 28일)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전생을 불러냅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生에서 저는 비였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서는 목마른 풀이었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선 젖은 풀 사이를 킁킁대는 떠돌이 개였고, 적어도 두어 번은 젖은 잎새에 매달린 무당벌레였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래 못 본 친구처럼 반갑고 남들이 잡초라 하는 풀들이 제 눈엔 그리 아름다운 거겠지요. 그러니 남의 손에 이끌리는 개들과 풀잎 위 위태로운 무당벌레 모두 그리도 애틋하겠지요. 사람으로 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살 때 새긴 작은 브이 (V)자가 지금도 제 이마엔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살았기에 파스타를 여러 끼 먹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중국, 프랑스, 일본, 영국, 독일, 인도, 쿠바, 베트남, 남아프리카,..

나의 이야기 2023.05.28

노년일기 167: 나의 노래 2 (2023년 5월 26일)

지난 5월 20일 이 블로그에 월트 위트먼의 시 'Song of Myself' 일부를 '나의 노래 1'이라는 제 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그 글의 속편입니다. 제가 자꾸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시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게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음에 시달린 귀, 쓸데없는 것들을 보느라 지친 눈, 불필요한 말을 하느라 피로한 입, 무엇보다 세상을 떠돌면 떠돌수록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2: I think I could turn and live with animals, they are so placid and self-contain'd, They do not sweat and whine about their condition, They do not..

오늘의 문장 2023.05.26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눈먼 소년 (2023년 5월 24일)

2011년 4월 9일에 이 블로그에 썼던 글을 우연히 다시 읽었습니다. 예산에서 사과를 키우시던 김광호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선생님이 연세 드시며 사과 농원을 그만두시면서 제가 사과 향기 맡는 일과 선생님과 연락하는 일이 줄었지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주한 미국대사관 도서관장으로 일하신 후 은퇴하셨고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글들 중엔 영어로 된 것이 많았는데, 그때 받은 영어 원문과 제가 축약 번역한 것을 함께 게재한 것입니다.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글, 선생님을 뵈온 것처럼 반가워 여기 다시 옮겨둡니다. 선생님, 안녕하시온지요? 눈 먼 소년 하나가 건물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저는 맹인입니다. 부디 도와주셔요"라고 쓰인 피켓이 있고 발치엔 모자가 놓여 있었..

오늘의 문장 2023.05.24

우린 '사사받지' 않는다 (2023년 5월 23일)

글의 제목 옆 괄호 속에 '5월 23일'이라고 쓰는데 이날이 무슨 날이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날입니다. 양심이 욕심보다 컸던 그는 저세상으로 갔고 그 같지 않은 사람들은 흰머리로 혹은 검게 물들인 머리로 뉴스 안팎을 총총댑니다. 우리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반면교사는 넘쳐도 교사는 드물고 스승은 더욱 드뭅니다.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받음을 뜻하는 '사사(師事)하다'가 '사사받다'로 잘못 쓰이는 일이 흔한 이유도 바로 이런 세태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말 산책 ‘사사’는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다 엄민용 기자 '선생(先生)’은 보통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

오늘의 문장 2023.05.23

노년일기 166: 나의 노래 1 (2023년 5월 20일)

오랜만에 응급실 카페에 앉아 월트 휘트먼 (1819-1892)의 'Song of Myself (나의 노래)'를 읽으니 아주 오래된 평화가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오십 년 전 갓 입학한 대학의 텅 빈 도서관에서 묵은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행복과 평화... 나의 행복은 이런 순간에 피어나는 꽃이고, 이 꽃은 50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습니다.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그의 시집 에 실려 있는데, 1855년 자비 출판한 1판에는 제목 없이 실렸고 역시 자비 출판한 2판에는 'Poem of Walt Whitman, an American (미국인 월트 휘트먼의 시)'로 실렸다가 1881~1882년에야 '나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52편 중 30편의 몇 구절이 특별히 와닿아 아래에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나의 이야기 2023.05.20

노년일기 165: 운전면허 없이 (2023년 5월 15일)

친구의 남편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10만 원이 들어있는 교통카드를 받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몇 해 전 쓰러져 시야가 좁아졌는데 시야는 회복되었지만 몸은 그 시간만큼 나이 들었겠지요. 아직 70대 초반인데 뭘 벌써 면허를 반납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면허가 '자유' 면허라고 생각하거나 자가용을 '자아의 확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면허를 반납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자동차일뿐 자유도 자아도 아니라고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1970년 대 후반 신문기자 시절 운전을 배웠습니다. 기자 노릇을 하려면 여기저기 다녀야 하니 배워두라고 신문사에서 서부자동차학원에 등록해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운전석에 앉아 클러치, ..

나의 이야기 2023.05.15

너희가 해바라기다! (2023년 5월 13일)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가로수 아래 핀 꽃들을 보며 해바라기다! 아니다! 목청을 높입니다. 노란 꽃이 아니니 해바라기는 아니고 같은 국화목에 속하는 꽃으로 보이지만, 저도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도 한마디 거들고 싶은 건 아이들이 꽃만큼 예뻐서입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스마트폰만 보며 걷는데 이 아이들은 찻길 옆 보도에 심긴 나무 아래 옹기종기 핀 작은 꽃들을 본 것입니다. '얘들아, 그 꽃은 해바라기가 아니야. 너희가 바로 해바라기야!' 마음 속으로만 얘기하며 아이들의 앞날을 축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컴컴해도 해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포기하지 마! 꿋꿋하게 자라서 주변을 밝혀줘!'

동행 2023.05.13

노년일기 164: 살아 있는 사람들은 왜? (2023년 5월 11일)

지난 4월 말 아파트 회장이 된 후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대표자회의 구성원들과 하루에 한두 번씩 회의를 하고 그래도 미진한 얘기는 전화로 하며 지난 회장이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습니다. 저 혼자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만 다른 분들의 지혜와 지식 덕에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합니다. 다행인 건 이런 상황에서도 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예기치 않은 나쁜 일에 휘말리면 일의 복잡성에 비례한 두통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제는 풍경을 바라보듯 상황을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습니다. 제가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된 데는 여러 친구들의 공이 큽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 친구들과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책 친구들... 요즘 바로 옆에서 저를..

나의 이야기 2023.05.11

밥과 리즈: Bob and Liz (2023년 5월 10일)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제 상관은 로버트 뱅크스 (Robert Banks)박사라는 문정관 (cultural attache)이고 그의 아내는 리즈 (Liz)였습니다. 기자 노릇 15년 후 7년간 칩거(?) 했는데 소위 IMF 사태 (금융위기)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주한 미국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대사관은 정부인데 저는 정부와 여러모로 다른 언론계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는 대사관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4년 3개월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뱅크스 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해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제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고, 기자생활만 한 까닭에 행정에 어두운 제게 행정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아..

동행 2023.05.10

노년일기 163: 아카시아 (2023년 5월 7일)

뒷산에 아카시아가 흐드러진 줄도 모른 채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어느 날 앞창을 여니 아카시아 향기가 와락 저를 감쌌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안아주는 향기가 저절로 눈을 젖게 했습니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을 피운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데도 그들은 화내는 대신 산을 내려 돌아와 포옹을 해주었으니까요. 이튿날엔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지겠구나 마음을 졸이면서도 뒷산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 이틀 후 내다보니 떨어진 흰 꽃들이 무수히 산의 배께를 덮고 있지만, 나무마다 떨어지지 않은 꽃들이 환했습니다. 꽃의 수가 준 데다가 습기를 머금어 향기는 줄었어도 뒷산은 여전히 아카시아 천지였습니다. 아카시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비를 ..

나의 이야기 202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