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 9

노년일기 173: 나쁜 일 속 좋은 일 (2023년 6월 28일)

공익법인 '아름다운서당'을 만들고 이사장으로 오래 일하신 선배님과, 그곳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사를 역임한 두 사람이 오랜만에 서울 시내 한복판 오래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작년 언젠가 만나고 처음입니다. 노년의 적조는 대개 노화와, 노화가 수반하는 질병과 관계가 있으니 만남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못 뵌 사이 선배님은 유명한 병의 환자로 병원 신세를 지셨고, 서당의 동료인 제 오랜 친구는 해외 여행 중에 다친 팔꿈치의 수술을 다시 받고 아직 재활 치료 중이었습니다. 저 또한 지난 주 내내 누워지내며 과연 오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으니, 세 사람 다 신고(身苦)를 겪은 셈입니다. 투병은 힘들었지만 투병을 회상하면서는 세 사람 모두 웃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과거에 두..

동행 2023.06.28

노년일기 172: 영화가 끝난 후 (2023년 6월 26일)

며칠 동안 고통에 잡혀 있다 일어나면 긴 영화를 보고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중력 아래 오롯이 빈 종이처럼 존재하던 시간을 채운 건 무수한 상념과 기억입니다. 젊은이에겐 포기할 수 없는 꿈과 계획이 있겠지만, 낡은 몸에 담긴 오래된 정신에게 미래는 말 그대로 '미래(未來)', 오지 않은 혹은 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상념과 기억을 털며 다시 직립하는 인간으로 돌아가려 준비하다 보면 앞서간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임기는 우리의 생김처럼 다른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는 아예 상관없는 것인가...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듯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 책상 앞에 앉습니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잡일들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 좋은 점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나의 이야기 2023.06.26

나는 솔로 (2023년 6월 20일)

텔레비전은 '바보 상자'라지만 세상과 세태를 반영하는 상자이기도 합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줄며 짝짓기 프로그램이 늘었습니다. 이혼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부부 상담 프로그램도 많아졌습니다. 배우나 탈렌트 아닌 사람들이 TV 화면을 채우는 일이 빈번한데, 그들이 화면에 나타나고 난 후 해당 프로그램의 댓글난은 그들의 신상 정보와 그들에 대한 평가로 가득 찬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출연하는 걸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출연해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밤이면 대개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봅니다.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특히 이것을 보는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방송국에서는 '나는 솔로이니 짝을 ..

동행 2023.06.20

점심: 마음에 점 하나 (2023년 6월 14일)

오늘 아침엔 경향신문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고 많은 세상... 매일 오던 신문이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됩니다. 집에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이 너무 적으니 배달하는 사람도 신이 나지 않고 그러다 무심코 빼먹은 걸까? 오히려 그랬으면 다행일 텐데... 신문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고 너무 편향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좋아하는 칼럼 두엇이 있어 보고 있습니다. 엄민용 기자의 '우리말 산책'도 그중 하나입니다. 글을 읽다 보니 지미 스트레인의 'Lunch Box'가 떠오릅니다. 정말이지 점심은 마음의 점! https://youtu.be/c75XSDPjtdM 우리말 산책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점심’ 우리가 하루 세 끼를 먹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끼니나 때를 가리키는 ‘..

오늘의 문장 2023.06.14

노년일기 171: 어떤 자서전 (2023년 6월 11일)

태어난 직후는 절망의 시기: 또 태어나다니! 십대는 절망과 도피의 시기: 어차피 죽을 텐데 왜 늙어 죽도록 살아야 할까... 책 속으로 도피. 이십대 삼십대는 가면의 시기: 온 힘을 다해 죽음에의 욕구를 누르며 남들과 같은 척하기. 사십대는 조롱의 시기: 아직 살아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한편 삶과 죽음을 어렴풋이 파악함. 오십대는 가끔 웃는 시기. 육십대는 조금 더 자주 웃는 시기. 칠십은 낯익은 절망과 만나는 시기. 희망이 보이는 시기.

나의 이야기 2023.06.11

노년일기 170: 큰 나무 아래 (2023년 6월 7일)

이 나라는 아직 건설 공화국이라 자꾸 큰 나무를 베거나 뽑고 작은 나무를 심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교 앞에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이 많았는데, 학교 앞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게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 한 귀퉁이에 있는 산인데 아직 한 번도 가 보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지금의 룸메이트가 제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그때이지만 제 꿈은 지금과 같았습니다. 늘 큰 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남편이 가난한 아내의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이니 전국에서 가장 값이 싼 산이었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살다가 힘들 땐 그 산을 생각했습니다. 난 언제든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나의 이야기 2023.06.07

나는 꽃 도둑 (2023년 6월 4일)

산책길 가로수 아래 꺾인 채 버려진 꽃이 여러 송이입니다. 노란 꽃, 하얀 꽃, 큰 꽃, 작은 꽃... 활짝 핀 얼굴도 점 같은 봉오리도 모두 꽃입니다. 이 꽃들을 꺾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땡볕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 가로수 밑에 이 꽃들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꽃을 꺾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 꽃을 건네받은 누구일까요? 시들고 있는 꽃이 가엾어서 집어들고 왔습니다. 노란 꽃은 목이 길고 하얀 꽃은 목이 짧아 한 꽃병에 꽂을 수 없으니 목 긴 꽃은 조금 깊은 병에 꽂고 짧은 꽃은 작은 술잔에 담습니다. 그래봤자 다 제 손가락 길이입니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봅니다. 꽃들이 소리없이 물을 빨아들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기가 돕니다. 땡볕 아래 말라 죽거나 꽃병의 물을 먹다 죽거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나의 이야기 2023.06.04

노년일기 169: 유월의 기도 (2023년 6월 1일)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늘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지혜는 버릴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용기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겠지요.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 쓰지 말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한 발씩 앞으로!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 AD)의 명상록 9권 33번 째 문단이 친구 같습니다. 33. All that your eyes behold will very quickly pass away, and those who saw it passing will themselves also pass away very quickly; and he who di..

나의 이야기 202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