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난을 광고하시라! (2011년 2월 9일)

divicom 2011. 2. 9. 13:00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월셋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1월 29일, 설을 목전에 둔 토요일이었습니다. 겨우 서른둘, 냉방에서 차디찬 주검이 된 그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다가구주택에 살던 세입자 송모(50) 씨였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고은 씨가 죽기 전에 송씨의 집 문 앞에 붙여 놓았던 쪽지의 내용입니다. 송씨가 음식을 챙겨 갔을 때 그는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양시 만안경찰서에 따르면, 갑상선 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고은 씨는 치료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날 굶은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월세도 여러 달 밀려 있었다고 합니다. 고은 씨의 유해는 지난 1일 충남 연기군에 있는 은하수공원에서 화장되었습니다.

 

2007년 시나리오 전공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를 졸업한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제작사와 일부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지만 영화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려왔다고 합니다. 그의 선배인 영화감독이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보면 신인 작가들은 2000만원 정도인 계약금 중 극히 일부만을 받고 시나리오를 넘긴다고 합니다. 잔금은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어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감독은 "제작사가 좋은 시나리오를 묶어두기 위해, 기약도 없는 제작 일정까지 작가 같은 약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한예종 영상원 동문들과 박종원 한예종 총장과 이창동, 김홍준 교수 등이 돈을 모아 유가족들에게 전달했으며, 고은 씨의 선후배들은 그가 쓰고 연출한 단편영화 <격정소나타> 상영회와 유작 시나리오 읽기 등을 열어 고인을 추모할 거라고 합니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그 재능을 꽃 피우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균형을 지향하는 우주의 섭리는 재능과 그 재능을 펼치는데 필요한 비용을 함께 주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천재가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지 못한 채 요절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비용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능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나리오는 잘 써도 깁밥집에서 김밥을 말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천재는 '보통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그들과 우정을 쌓고, 그 우정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만인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해도 남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의 불행과 가난을 광고하여 '보통 사람들'의 자비를 구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그 자비에 보답해야 합니다.

 

죽음은 정신이 아닌 육체로부터 옵니다. 젊고 의지가 강했던 고은 씨는 바로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았다면 그의 선후배와 스승들이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그의 때이른 죽음, 그가 가졌던 재능의 낭비, 그의 외로움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다시는 고은 씨와 같은 죽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