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이 며칠 계속되니 뒷산의 나무들도 집 앞의 느티나무도 행복해 보입니다.
햇살을 받은 잎들이 근심 없는 아이들처럼 반짝입니다.
풀이 자라는 소리, 산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울 때 제주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여행은 싫어하지만 제주도의 검은 흙과 초록이 문득 궁금합니다.
마침 김수종 선배가 자유칼럼에 제주도 얘기를 쓰셨기에 옮겨둡니다.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던 두 외국인이 제주 흙의 일부가 되셨다고 합니다.
만나뵌 적 없지만 존경스러운 패트릭 맥글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신부님과
프레데릭 더스틴(Frederic H. Dustin) 교수님께 감사하며, 삼가 두 분의 안식을 빕니다.
김 선배님의 글에는 '성이시돌 목장'의 '성이시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시돌'이 궁금해 찾아보니 스페인의 학자로 세비야의 대주교였던 성 이시돌(Saint Isidore)이 나옵니다.
| | | | | ‘성이시돌 목장’과 ‘미로공원’에서 온 부음 | 2018.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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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에 돌아가 대학을 다녔는데 한국인 멘토로부터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라는 충고를 듣고 1955년 연희대학교 강사로 시작하여 중앙대학교 홍익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때 사귄 소설가 정비석, 시인 조병화, 신문기자 최병우 등이 더스틴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더스틴 교수는 1971년 마리 루이스 겝하트와 결혼한 후 제주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제주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2년 만에 아내가 암으로 타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더스틴 교수가 평생 제주에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83년 영국인 친구가 그에게 건네준 ‘미로'(迷路)디자인에 대한 기사를 보고 난 후였습니다. 더스틴 교수는 김녕에 마련한 그의 땅에 미로공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미로 디자이너 애드리언 피셔와 국제우편을 통해 연락하며 미로공원을 설계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1987년 영국에서 구입한 상록수 렐란디(Leyllandii)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랠란디는 속성으로 성장하고 가지가 빽빽하게 자라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정원수입니다. 미로공원 조성에 제격의 나무입니다.
더스틴 교수는 김녕 미로공원을 완성하고 1995년 무료로 개방한 후, 1997년부터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미로공원에서 생긴 수입을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자선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매년 수천만 원씩 그가 교수생활을 했던 제주대학교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제주대학에 기부한 총액은 7억 원이 넘습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독신으로 살았으며, 그가 남긴 것은 1,300여 그루의 아름다운 상록수 렐란디와 미로공원에 떼 지어 다니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입니다.
21세기 들어, 특히 지난 10년간 제주도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국제자유도시라는 이름 아래 외국인 투자유치 및 노동자 취업이 이뤄졌고, 서양인, 중국인, 일본인, 동남아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주도가 외국인이 살거나 구경하기에 좋은 곳으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맥그린치 신부와 더스틴 교수가 제주도에 바친 삶이 더욱 값지게 보입니다. 그들은 주민들이 정말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 때 제주에 찾아와 농민을 일깨우고 황무지를 개간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의적인 미로공원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생기는 이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제주도의 변화 속도를 볼 때 머지 않아 제주도를 움직이는 주류 세력이 이 두 서양인이 흘린 땀과 애환을 별로 기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성이시돌 목장의 초원과 미로공원의 렐란디 상록수가 오래오래 남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여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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