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2010년 4월 20일)

divicom 2010. 4. 20. 09:59

"나이 예순 된 사람이 그리 크게 변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09년 한 해 동안 나는 놀랄 만큼 크고 깊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고맙게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에 이 변화의 곡절이 모르는 사이에 담겨 있었음을 이제 돌아본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수십 년 동안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체로 불편했고, 때로는 험했다. 어려서부터 '보통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으신 것이 은근히 불만스러웠거니와, 23년 전 내 나이 서른여덟일 때 비로소 아버지 일기를 보여주신 이후 그분에게 매우 비판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일기는 몇 해 후 <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그분이 사후 40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조연으로 나온 어머니와 엑스트라로 나온 나도 음덕을 입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석연치 않고 아직도 아주 풀리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다. 왜 어머니는 그렇게 늦게야 그 일기를 보여주신 것일까?

반공법이 핑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사 공부한다는 아들이 나이 마흔 다 되도록 그렇게 감춰놓으실 수가 있나? 고민을 나눌 자격이 이 아들에게 없다고 무슨 근거로 판단하신 것인가? 일기를 감춰놓은 것은 아버지를 감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돌아가신 연세가 다 되어서야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깨닫고 내 불초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마음 때문에 원망이 더 컸다. 40대에 사춘기를 겪은 셈이다.

그 후 20년간 나는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지냈다. 형식적인 모자 관계는 지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분을 위선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니 스스로 떳떳할 수 없고, 따라서 세상 사는 길도 갈수록 편벽하게 되었다....

 

8년 전부터 연길에 가 살며 이름 없이 파묻혀 살 생각을 했다. 칼럼 쓰기도 그만뒀다. 그러다가 2005년 10월 한국에 다니러 온 길에 많이 쇠약해지신 어머니 모습을 보고 당분간 국내에 머물기로 했다. 계룡산의 암자에서 지내고 계셨는데, 절살이가 한계에 이르신 것 같아 양로원에 옮기시는 것이라도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애틋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는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본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지내다 보니 그 동안 구상해 오던 책 하나를 정리할 계기를 얻어 체류가 자꾸 길어지고 있던 차에 2007년 6월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 동안 살펴둔 파주의 요양 병원에 모시고 시병 생활을 시작했다.

최소한의 의무로 생각하고 시작한 시병 생활인데, 원래 체질에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부자연스럽게 멀어졌던 모자 관계의 회복 추세 때문인지, 갈수록 그 의미가 커지고 깊어졌다.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연민으로 순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어머니 마음도 편안해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다가 기력이 급격히 떨어져 튜브피딩을 시작할 때 뇌 단층촬영을 한 차례 해보고는 떠나실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2008년 11월 이후의 회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2월 31일 입으로 식사를 시작하시고 꾸준히 회복일로였다. 지난 6월에 퇴원해 요양원으로 옮기실 수 있었고, 이후 내내 좋은 건강을 누리고 계시다. 걸음을 못하실 뿐이지, 이제 찻잔을 손에 들고 할머니들과 담소를 나누실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회복이다. 한두 해 사이의 어려움을 이겨낸 정도가 아니라 30년 전, 퇴직 이전의 건강을 되찾으신 것 같다...

 

어머니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도 떳떳해질 수 있었다. 가족관계도 원만히 풀어가지 못하는 놈이라는 자격지심을 벗어날 수 있었고,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비지심에 얽매임 없이 아끼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사칼럼을 다시 쓰게 되었는데, 그 전에 쓰던 칼럼과 자세가 달라졌다. 종래의 태도는 연전에 낸 책 제목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에 나타나 있다. 나는 바깥에 있었다. 시사에 대해서든 역사에 대해서든 내 비평은 개입 없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이었다.

칼럼에 다시 손대게 된 계기는 2008년 가을의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이었다. 역사 교과서 파동을 보며 <밖에서 본 한국사>의 취지를 이어 펼칠 필요를 느낀 것이었는데, 이 작업을 통해 나는 현실 감각을 얻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내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2009년 들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현 정권이 짖을 줄만 알지, 물 줄은 모르는 개 같은 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산 참사도 마음먹고 저지른 게 아니라 까불다 사고 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데 일단 주워 담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보니, 똥개도 광견병 걸리면 물 줄 안다고 날뛰게 되었다.

무책임한 인간은 잘못된 일이 있을 때 더 큰 잘못을 저질러 앞서의 잘못을 감추려 한다. 촛불 사태 때부터 현 정권은 전임 대통령에게 짖어댐으로써 비판의 소리를 가리려 하고 있었는데, 용산 사태 뒤에는 진짜로 물겠다고 날뛰기 시작했다. 사태는 파국으로만 흘러갔다...

 

2009년에 나는 '노빠'가 되었고, 분노를 많이 느끼며 지냈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도 분노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분노를 아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2009년의 내 분노는 그 이전의 분노와 다른 것이었다. 아웃사이더의 분노와 인사이더의 분노 사이의 차이라 할까?

사회와의 총체적 접촉을 인정하는 인사이더에게는 분노가 분노에서 분노로 끝나는 명쾌한 것일 수 없다. 고통이 뒤섞이고 슬픔이 곁들이는 것이다. 타자만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기에 슬프고, 깨끗이 해소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기에 고통스럽다. 뱉어버리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분노요, 고통이요, 슬픔이다.

"미친 것들!"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서서 잊어버릴 수 있던 아웃사이더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 그러나 괴롭고 답답해도 이제 이 사회를 다시 떠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돌아가신 분이 남긴 말씀 "함께 사는 세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많이 보지 않고 틀어박혀 지낸다. 그러나 "함께 사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의식은 분명히 전과 달라졌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어머니다! 어머니와 불화하던 시절, 나는 세상이 두려웠다. 감정이 남과 뒤얽히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분이 내게 편안히 의지하시고 내가 그분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펴드리게 되니, 겁나는 것이 없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함께 사는 사람들과 함께 겪으며 당당하게 살아갈 자신감을 얻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세상"을 즐겁고 편안하게 느끼니까.

한 가지 얼마동안 어색했던 것은 내가 노빠이면서 보수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 스스로 구분할 필요도 느낄 일 없이 살아오다가 <뉴라이트 비판>을 하면서 밝히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조금 생각해 보니 보수 같았다. 그러고도 미심쩍어서 보수주의에 관한 책까지 구해서 읽어보며 더 생각해 봤다. 생각할수록 제대로 찍은 것 같다. 이제는 아주 자연
스럽게 느껴진다.

나를 진보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 쪽 인사들과 교우 관계도 많고 수구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강하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들에게 나는 내가 "향상심도 없고 정의감도 약한 인간"이라고 겸손한 척하며 말한다. 그 개떡 같은 말을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으로 찰떡처럼 알아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그토록 마음이 너그러운 내게도 2009년 현 정권의 행태는 너무했다. 이 책에 실린 비판 중에는 과격하게 보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봐도 진짜 과격한 내용은 없다. 엄청나게 좋은 세상을 요구하는 글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최소한의 요건을 주장한 글일 뿐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과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절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최소한의 요건,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는 내 마음은 절실하다.

대중 집회에는 한 번 고개를 들이밀지 않으면서도 그 한 해를 나는 이 사회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수시로 적은 이 기록이 그 때를 지나면 그냥 지나가버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게는 하나의 전환으로 의미가 남는 기록인데, 그 의미를 함께 새길 독자들을 찾아주겠다는 서해문집이 고맙기 한량없다."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에서 발췌 인용.

 

김기협의 글을 읽다 보면, 기업을 세우는 일이나 큰 부자가 되는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나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일도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언론 "프레시안 (www.pressian.com)"에 "함께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글을 연재해온 그가 바로 김성칠과 이남덕의 아들이니 말입니다. 김성칠은 한국전쟁 중 좌우 어느 쪽에도 몸을 담지 않다 1951년 10월 한밤중에 자객의 손에 스러진 역사학자이고, 이남덕은 존경받는 국어학자일 뿐만 아니라 겨우 7년 반 동안 함께 산 남편의 일기를 반공법의 서슬이 퍼런 40여 년 동안 간직하여 마침내 1993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분입니다. 바로 그 책 <역사 앞에서>는 근 이십 년 동안 제게 거울이며 등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역사 앞에서>를 읽다 보면 김성칠이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게 기쁘고 영광스러운 한편 그를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어리석음이 통탄스럽습니다. 여러모로 아버지를 닮았으되 어떤 면에서는 두어 발 더 나아가 있는 김기협, 그만은 결코 잃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