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아직 깊은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 하나가 조각나 치과에 갔습니다.
올 설 연휴 끝 어머니가 떠나시고 여러 달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가셨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이 하나가 조각났습니다.
내 것인 마음은 슬픔을 눈물로 표현하고,
부모님이 주신 몸은 부모님이 주신 이를
조각냄으로써 슬픔을 표현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좋아하는 북카페에 갔더니 평소에 앉던
자리에 이미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을
읽으려 했는데... 하는 수 없이 다른 자리에
앉았지만 오코너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앓다 돌아가신 홍반성
루푸스에 걸려 39세에 요절한 오코너...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속좁은 신자들을
노엽게 하는 글도 많이 썼습니다.
마침 테이블 위에 쌓인 책들 중에 옥스포드
월드 클래식에서 나온 성경 <The Bible>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들추다 755쪽 전도서
7장에서 슬픔을 얘기하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A good name is better than precious ointment;
and the day of death than the day of one's
birth. It is better to go to the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the house of feasting: for that
is the end of all men; and the living will lay it
to his heart.
Sorrow is better than laughter: for by the sadness
of the countenance the heart is made better.
The heart of the wise is in the house of mourning;
but the heart of fools is in the house of mirth.
명성은 귀한 연고보다 낫고, 죽는 날은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 애도 중인 집에 가는 게 먹고 즐기는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든 인생은 애도로 끝나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남으니까.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슬픈 얼굴이 더 나은 마음을
만드니까.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애도 중인 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웃음소리 나는
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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