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6

빈집 (2022년 9월 26일)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을 '빈집'이라 합니다. 미분양 아파트처럼 처음부터 빈집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 살다 떠난 집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옛집'이 어느 날 '빈집'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빈집을 보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 집을 옛집이라 부를 사람들, 그 마당을 어슬렁거렸을 강아지와 고양이, 그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웠을 나무들, 그 뜰 가득 향기를 채웠을 꽃들... 포털사이트 '다음'이 10월 1일부터 블로그를 없애고 티스토리로 통합한다는 통보를 들어서일까요? 13년 동안 글을 써온 이 블로그를 드나드는데 빈집을 드나드는 느낌입니다. 아래 그림은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가 자신의 네이버 블로그 '詩詩한 그림일기'에 신동옥 시인의 시 '빈집'과 함께 올린 그림입니다. 아래엔 그림..

나의 이야기 2022.09.26

번역자의 부탁: 최소한의 성실성 (2022년 9월 18일)

직장생활을 하던 때나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는 지금이나. 제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최소한'입니다. 신문사와 통신사에서 일할 때 동료들에게서 기대한 것도 최소한의 성실성이었습니다. 기자로서 기사를 잘 쓰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최소한 육하원칙에 입각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는 밝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빠뜨리거나 틀리게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문 1판이 나온 후 그런 기사를 발견하면 교정부에 비치된 교정지에 표시를 했습니다. 다른 부 기자들이 교정을 많이 보면 교정부원들의 일이 늘어나니 교정부원들은 싫어했지만, 하는 수 없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 못 본 척하는 것은 근무태만이고 독자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니까요. 번역을 하는 지금, 대개 다른..

동행 2022.09.18

<월든>이 하는 말 (2022년 9월 15일)

어느새 9월의 한가운데입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 사유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8월 말 송파위례도서관 인문학 열전 수업 덕에 적어두었던 의 문장들 소개합니다. 아래의 문장들은 모두 1장 경제 (Economy)에 나옵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의 생략을 뜻합니다. “Age is no better, hardly so well, qualified for an instructor as youth, for it has not profited so much as it has lost.” “나이가 많다는 게 젊음보다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기 때문이다.” “Most of the luxuries, and many of the so ca..

오늘의 문장 2022.09.15

달 보러 망 보러.. (2022년 9월 10일)

부모도 자식도 평생 함께하진 못하지만 해와 달은 우리가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우리를 지켜봅니다. 21세기 백년 동안 보름달은 1241번 나타나는데 완전히 둥글어 '망望'을 이루는 날은 대개 음력 16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 한반도 위의 달은 지난 백년 간 뜬 달 중에 떠오를 때부터 가장 완벽한 망을 이뤘다고 합니다. 서둘러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아야겠습니다. '望'은 말 그대로 '바랄 망', 가슴에 바람을 품고 달님을 우러러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두루 아실 달님, 달님 덕에 태어나는 시와 노래...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소서. 사람은 누구나 달님 같아 남들에게 보여주는 얼굴 아닌 얼굴 있으니 당신 닮은 그들의 노고를 위로해주소서.

동행 2022.09.10

고추 선물, 배보다 큰 배꼽 (2022년 9월 8일)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배나 배꼽을 본 적은 없고 그 속담이 은유하는 상황도 별로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어제 오랜만에 동생과 점심을 먹고 시골의 공동체에서 가꾼 푸성귀와 곡식을 파는 가게에 들렀습니다. 투명 비닐봉지에 든 초록잎들이 눈길을 끌기에 물어보니 고춧잎이었습니다. 베란다에서 시들고 있는 고춧잎이 떠올라 3천 원을 주고 한 봉을 샀습니다. 집에 도착해 봉지를 여니 고춧잎과 고추가 달린 고춧대가 엉켜 있었습니다. 고추를 따로 따서 팔았으면 돈을 더 많이 받았을 텐데 손이 부족해 일일이 따지 못하고 고춧대째 잘라 판 것 같았습니다. 고춧잎과 고추를 따서 분리했습니다. 빨갛게 익은 고추, 몸이 새우처럼 휜 고추, 긴 고추 등 온갖 형태의 고추들을 줄기에서 ..

동행 2022.09.08

구월이 오는 길 (2022년 9월 1일)

8월 마지막 날 오후 네 시 반, 27킬로미터 떨어진 송파위례도서관을 향해 차를 타고 나섰습니다. 길엔 차가 많고 유리창엔 자꾸 눈물 같은 비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멀미와 싸우며 도서관 인근 식당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맑은 된장국을 먹자 점차 속이 가라앉았습니다. 단출한 저녁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습니다. '인문학 열전'의 한 회를 맡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을 강의하러 간 것인데, 2019년에 처음 갔으니 어제가 네 번째 강의였습니다. 1845년 7월 4일 28세에 숲속 생활을 시작해 2년 2개월 2일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살았던 소로우와 그가 그때의 일을 기록해 1854년에 출간한 을 수강자들과 함께 읽다 보니 소로우와 비슷하게 오두막 생..

동행 2022.09.01

텅 빈 캔버스 (2022년 8월 22일)

책의 다양함은 사람의 다양함을 닮았습니다. 심각한 사람, 웃기는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듯 어떤 책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고 어떤 책은 소리 내어 웃게 하고 어떤 책은 먼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네델란드 화가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동생 테오 (Theo van Gogh: 1857-1891)에게 보낸 편지들은 읽을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줄곧 동생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야 했던 형, 그 형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6개월 후 서른셋 젊은 나이에 사망한 동생... 에서 형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옮기며 고흐처럼 '진리를 알고' 있으나 동료 인간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외로이 '나아가는' 천재들을 생각합니다. 우리 보통 인간들은 모두 그들에게 빚..

오늘의 문장 2022.08.22

기자를 찾습니다! (2022년 8월 16일)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해 12년 만에 끝낸 기자 생활을 후회한 적은 없었습니다.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를 거치며 훌륭한 인물들, 천박한 위선자들, 매명에 뛰어난 사기꾼들을 만났고, 다양한 향락과 그보다 더 다양한 불행도 보았습니다. 기자 생활을 한 덕에 천국도 지옥도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돈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고 돈과 권력이 이란성 쌍둥이가 되고 기자가 '기레기'가 된 후, 신문이나 방송의 기자가 하루 아침에 정부 요직을 맡아 '언론은 정부를 감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부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늘면서, 기자였던 과거가 부끄러울 때가 많아졌습니다. 기자들이 노트보다 노트북을 선호하게 되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과..

동행 2022.08.16

아! 국립현대미술관 (2022년 8월 13일)

젊은 그림 수집가들이 늘어나며 미술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지만 의미 있는 전시와 볼 만한 전시를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지난 5월엔 연희동 일원에서 열리는 연희아트페어에 갔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작은 갤러리들을 연계해 여는 미술 행사인데 손과 머리의 거리가 아주 먼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눈을 씻어야겠구나... 현대미술관의 세 관 중에서도 덕수궁관을 좋아하니 덕수궁에 가야지... 그러다 어제 신문에서 아래 글을 보았습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에게 감사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8110300055 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국..

동행 202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