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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일기 181: 천사를 만난 시간 (2023년 8월 9일)

나이가 쌓일수록 장례식장 방문도 늘어납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나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장례식장은 심오한 교육이 행해지는 교실입니다. 그 교실의 어떤 학생들은 말이 없지만, 어떤 학생들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집니다. 죽음의 힘은 사람의 행태도 바꾸나 봅니다. 어제 일산의 한 장례식장에 찾아갈 때는 그 어느 장례식장에 갈 때보다 힘겨웠습니다. 죽은 사람이 겨우 서른 넷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전화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순간엔 숨을 쉬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늦게 결혼한 친구의 아들로 실력 있는 스케이트 선수로서, 핸섬하고 다정한 선생님이자 코치로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직장 가까운 데서 홀로 살다가 돌연사했다니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나의 이야기 2023.08.09

노년일기 180: 고통의 시한 (2023년 8월 6일)

어머니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외출을 좋아하셨고 걷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주말에 밖에서 두 딸과 점심을 하시고 나면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귀가하시곤 했습니다. 중년엔 등산을 즐기셨고 노년 초입엔 건강을 위해 춤을 배우시기도 했습니다. 올봄 만 아흔셋을 넘기신 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다리가 아프고 고꾸라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끔 통증의학과에 가서 주사를 맞으시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흘 전 집 앞 경로당에서 함께 사는 맏며느리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혼자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경로당에 와서 자신을 데리고 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100 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 이튿날 아침엔 아예 혼자 일어서는 일조차 어렵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런 상태가 되신 어머니는 극심..

동행 2023.08.06

불을 끄면 (2023년 8월 3일)

수양딸 덕에 한국에서 가장 첨단적인 백화점이라는 '더현대' 구경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그냥 백화점이 아니라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2023년 현재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무수한 사람들, 지하 6층 주차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들... 그곳의 사람들은 그곳 밖의 사람들처럼 '다름'에 민감하겠지만, 그 '다름'은 불만 끄면 모두 사라지겠지요. 셸 실버스틴의 시가 얘기하듯... 다르지 않아요 땅콩처럼 작든, 거인처럼 크든, 우린 다 같은 크기에요 불을 끄면. 왕처럼 부유하든, 진드기처럼 가난하든, 우리의 가치는 다 같아요 불을 끄면. 붉든, 검든 주황 빛이든, 노랗든 하얗든, 우린 다 같아 보여요 불을 끄면. 그러니 모든 걸 제대로..

동행 2023.08.03

8월, 위엄 있고 인상적인 (2023년 7월 31일)

7월이 끝나는 것을 이렇게 반긴 적이 있을까요? 장군으로서, 정치가로서 적들을 물리치는 데 능해 결국 독재자로 군림했던 시저 (Julius Caesar: 100 BC-44 BC), 그의 이름을 딴 달이어서 그럴까요? 7월은 물과 열로 세계를 통치한 폭군이었습니다. 눈물과 화상으로 얼룩진 7월을 둘둘 말아 우주 멀리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어제 저녁 대차게 내린 소나기는 남은 7월을 씻어내고 8월을 맞으려는 자연의 몸짓이었겠지요. 8월은 열 달로 구성되었던 로마의 달력에선 여섯 번째 달이어서 여섯 번째를 뜻하는 'Sextilis'로 불렸다고 합니다. 기원 전 700년쯤, 1월과 2월이 추가되어 열두 달이 되면서 여덟 번째 달이 되었고, 로마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로 군림한 어거스트 (아우구스투스: Caesar..

나의 이야기 2023.07.31

노년일기 179: 생-로-병-병-병-병-사 (2023년 7월 29일)

생-로-병-사 (生老病死), 네 시기 중 '로'가 길어지며 '병'의 시간도 늘어납니다. 예순을 넘겨 살면 오래 살았다고 환갑 잔치를 했는데, 이젠 일흔을 넘겨도 막내 취급을 받는 일이 흔합니다. 병을 앓는 노인이 많아지며 '생로병병병병사'라는 말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죽었을 상태의 노인들이 의술과 의료의 발전 덕에 죽지 않고 삶과 죽음이 반반씩, 혹은 2 대 8이나 1 대 9로 구성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 상태로나마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병병병병'의 기간엔 으레 병자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큰병으로 수도 없이 고비를 넘기면서도 담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훨씬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려진 병을 앓으면서도 끝없이 징징거려 주변을 괴롭히는 ..

나의 이야기 2023.07.29

졸부들의 합창 (2023년 7월 27일)

한 동네에 오래 살면 동네를 닮는 걸까요? 오래된 동네의 주민들은 대개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옷으로 얘기하면 헌옷 같은 것이지요. 집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한 곳에 고층아파트 타운이 생기며, 본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새 동네의 주민들은 새옷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는데 덧붙여 티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입주한 아파트들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곳에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아파트들이 늘어나며 제 단골 카페에도 새로운 고객들이 늘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목소리가 크다는 겁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애, 너 뭐 먹을래?" "난 아아!" 하고 외치는 식인데 카페에 자리잡은 후, 즉 카페가 조그맣..

동행 2023.07.27

양심의 소리 (2023년 7월 24일)

성공의 본래 뜻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지만 요즘엔 '부자가 되는 것'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 혹은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성공'하지 못하는 건 남의 부러움을 사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죽게 한 홀로코스트 (Holocaust: 1933-1945)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 (Viktor Frankl: 1905-1997)의 책 에서 '성공'의 다른 정의를 만났습니다. 1984년 판에 부친 서문에 나오는 글인데, 거기 나오는 '양심의 소리'라는 표현이 뭉클합니다. 2023년 한국에서 가장 잊힌 것이 있다면 바로 '양심'일 테니까요. 역자가 빅토르 프..

오늘의 문장 2023.07.24

노년일기 178: 두 가지 질문 (2023년 7월 21일)

지난 주 모임에서 한 친구가 토로했습니다. 이제는 이룰 것이 없어 살맛이 나지 않고 우울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연했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는지는 모르나 제가 보기에 그는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자신과 자녀들의 윤택한 생활을 성취, 보장했을 뿐 인생에 대해 모르기는 일곱 살 아이와 같으니까요... 그에게 무엇을 이루었느냐고 물으니 목표했던 것을 다 이뤘다고 말했습니다. 교수 노릇을 하다 은퇴했고 여러 개의 건물을 소유했으니 다 이룬 걸까요? 생각하기 전에 제 입이 묻는 소릴 들었습니다. "혹시 그 목표들이 너무 사소한 것들 아닌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목표'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 건 이 나라가 '목표' 지향 국가라 그럴까요? 지난 19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KIAS)에 문을 연 허준..

나의 이야기 2023.07.21

노년일기 177: 노년의 적 1 (2023년 7월 18일)

'적 (敵)'은 '해를 끼치는 요소' 또는 '승부를 겨루는 상대편'을 뜻합니다. 공적으로 노년에 들어선 지금 저의 첫 번째 적은 저 자신입니다. 자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제가 저를 괴롭힙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입을 옷을 꺼내놓았어야 하는데 꺼내놓지 않아 짜증이 날 때가 있고, 옷을 벗고 입는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손이 둔해진 것을 느끼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부엌에서 일하다 양파를 가지러 베란다에 가서는 베란다 빨랫줄의 빨래만 걷고 빈손으로 올 때가 있는가 하면,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해 베란다를 청소한 후 판판하게 펼쳐 널어야지 하고 빨랫줄 한쪽에 걸쳐 놓았던 손수건을 그냥 두고 올 때도 있습니다. 오래 산 집인데도 집안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조금만 오래 서서..

나의 이야기 2023.07.18

노년일기 176: 죽어라 살다가 (2023년 7월 15일)

전문적인 사기꾼이 아닌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모인 어제 점심 자리의 주제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월에 어머니를 잃은 친구, 며칠 전 아주버님과 사별한 친구, 남편이 아주 떠난 후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두 선배들... 죽음은 이 오랜 친구 모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돈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가 누울 공원묘지의 묫자리를 사려는데 몇 인 분짜리를 사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갖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건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식들이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

동행 202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