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176: 죽어라 살다가 (2023년 7월 15일)

divicom 2023. 7. 15. 08:23

전문적인 사기꾼이 아닌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모인

어제 점심 자리의 주제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월에 어머니를 잃은 친구, 며칠 전 아주버님과 사별한

친구, 남편이 아주 떠난 후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두 선배들... 죽음은 이 오랜 친구 모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돈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가 누울 공원묘지의 묫자리를 사려는데

몇 인 분짜리를 사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갖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건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식들이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식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데 제 아이에게 조금 미안했습니다.

사실 그 친구는 편법까지 동원해 자식들이 편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저는 아이가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은 한 적이 없고 '네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만

해서 아이는 성인이 된 후 줄곧 편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어제 그 자리에서 얘기하진 않았지만 제게도 죽음과 관련된

희망이 하나 있습니다. 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 산으로 들어가

나무들 아래 바위 옆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산길을 걸어갈 체력이 있어야

하고 기다림을 견디는 정신적 육제적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죽음을 얘기한 어제 모임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늘 파도나 서핑에 대해서만 얘기하다가 바다의 빛깔, 감촉,

깊이에 대해 얘기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사는 대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묫자리를 걱정하지 말고

죽어라 살다가 일거에 떠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