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88

노년일기 47: 오빠의 길, 장손의 길 (2020년 8월 19일)

저는 동생은 셋이지만 오빠는 하나뿐입니다. 아들이 대접받고 종손은 더 대접받던 시절 종손으로 태어난 오빠는 부모님의 극진한 정성 속에 자랐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 지도를 보고 그린 지도는 원화를 능가했고, 삼국지의 본문 밖 여백에 그려넣은 만화는 본문보다 재미있어 동생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음악을 두루 좋아하고 노래도 잘했습니다. 이라는 노래책을 펼쳐놓고 바로 아래 동생인 저와 노래를 부르면 오빠는 늘 화음을 담당했는데, 처음 부르는 노래에도 화음을 참 잘 넣었습니다. 마음속으론 미술이나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오빠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팝송 모임에 나가고 월간 에 칼럼을 연재하여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가 되었습니다. 오..

동행 2020.08.19

사랑제일교회. 그리고 ‘신들의 여름’ (2020년 8월 16일)

서울 성북구의 사랑제일교회와 관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 19) 확진자가 하루 사이에 190명이나 늘어 누적 확진자가 249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하루 동안 이 교회와 수도권 다른 교회에서 추가 확진된 환자는 21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보건당국에서는 교회 모임을 자제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신자들의 귀엔 그 요청이 들리지 않나 봅니다. ‘믿음’은 참 놀라운 것이지요. 우연히 펼친 작은 노트에서 2011년 5월에 에드워드 라슨 (Edward J. Larson)의 에서 가져다 적어둔 구절을 만났습니다. 책 제목을 직역하면 '신들을 위한 여름'이지만, 사실 이 여름은 1925년 미국에서 벌어진 유명한 재판을 중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담은 것이니 '위한'이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은..

동행 2020.08.16

기안84의 ‘사회 풍자’, 그리고 ‘소파 승진’(2020년 8월 14일)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서 본 어떤 기사 덕에 불쾌한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그 기사의 제목은 ‘기안84 웹툰, 또 여성혐오 논란 “연재 중단하라” 청와대 청원도‘였고, 10면 오른쪽 아래에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를 보면, 기안84가 네이버웹툰에 연재하는 ‘복학왕’이라는 웹툰의 ‘광어인간’ 편에 여주인공 봉지은이 인턴으로 근무하던 대기업에서 자신을 구박하던 남성 상사를 사귄 덕에 정직원이 된 것으로 나오는데,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 웹툰의 연재 중지를 요구하는 글이 게재돼 하루만에 6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청원인은 이 웹툰이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여성을 희화화”했으니 ‘웹툰 연재 중지를 요구합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기안84는 웹툰의 내용 일부를 수정하고 사과했으나 비판 여론..

동행 2020.08.14

노년일기 46: 사이좋은 부부 (2020년 8월 11일)

구순의 어머니와 점심을 먹는 건 주례행사입니다. 너무 덥거나 폭우가 내려 한 주쯤 거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 전부터 ‘집콕’을 좋아하는 저와 달리 어머니는 ‘매일 나가야 하는’ 분이니까요. 요즘 어머니와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사이좋은 부부를 여럿 보았습니다. 대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한 아이들을 대동한 40대 부부였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삼계탕 집에서 본 부부에겐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몇 인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계탕과 전기구이통닭으로 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 옆에는 빈 맥주병 세 개가 있는데 제가 도착한 후 바로 한 병을 더 주문했습니다. 큰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느라 바쁘고 작은 아이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꾸 소리를 질렀지만 아버지는 맥..

동행 2020.08.11

오늘 나는, 오늘 우리는 (2020년 8월 4일)

또 펑 젖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글피, 즉 오는 금요일이 입추이니 젖은 여름 끝에 젖은 가을이 오려는 걸까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시시(詩詩)한 그림일기'를 산책하다가 거울을 만났습니다. '오늘 나는', 오늘 우리는, 젖은 여름을 초래한 우리는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을 잊는 것 아닐까요? 맨 아래 글은 김수자 씨의 글입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오늘 나는 - 심보선 illustpoet ・ 2018. 1. 4. 17:57 URL 복사 이웃추가 종이에 먹, 콜라주 오늘 나는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읽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

동행 2020.08.04

천박한 도시(2020년 7월 27일)

누구의 말이냐에 상관없이 옳은 말은 옳은 말, 틀린 말은 틀린 말입니다. 저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모르지만 그가 서울을 '천박한 도시'로 표현한 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은 '천박한 욕망으로 가득한 천박한 도시' 가 맞습니다. 천박한 사람들은 좋아하고 천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감을 느끼는 도시... [여적]‘천박한 도시’ 조운찬 논설위원 1990년대 초 한국을 처음 방문한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서울 한강에 늘어선 아파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서울에 왜 이리 아파트가 많으냐’고 물었을 때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죠.” 그는 다시 놀랐다.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나 벨기에에는 한국과 같은 아파트가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레조..

동행 2020.07.27

자랑스러운 기부왕 이수영 선배 (2020년 7월 24일)

이수영 선배를 처음 뵌 건 1977년인가 1978년입니다. 당시 한국일보그룹에는 일곱 개의 언론사가 있었는데 이 선배님은 서울경제신문에서 재계를 출입하시고 저는 코리아타임스 사회부 병아리 기자였습니다. 언론사에 여기자가 많지 않던 시절, 한국일보그룹의 신문과 잡지에는 다른 언론사보다 여기자가 많았고 바쁜 중에도 가끔 만나 밥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 선배님은 당당한 태도에 직설화법을 구사하셨지만 따스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배님은 매니큐어에 대한 저의 편견도 깨뜨려 주셨습니다. 요즘은 네일아트가 유행이고 매니큐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엔 매니큐어를 하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선배님은 늘 손톱을 빨갛게 칠하고 다니셨습니다. 별로 멋을 내지도 않는 분인데 왜 그러실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직접 여쭸..

동행 2020.07.24

노년일기 33: 코로나바이러스와 스타벅스 (2020년 6월 14일)

어제 오후 연희동 스타벅스에 친구를 만나려고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일, 이층 할 것 없이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여러 달째 싸우고 있는 정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가 2미터는 되어야 한다고, 정 안되면 1미터라도 떨어져 앉으라고 호소하지만, 스타벅스의 손님들 사이엔 거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이부터 중년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겨울 대중목욕탕처럼 붐비는 것을 보고 앉지 않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어린이와 60세 이하 연령층의 사망률이 낮다는 통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찾아오는 불행이 나에겐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은사망상(恩賜妄想) 때문일까요? 사망률이 아무리 낮아도 죽는 사람은 하나뿐인 생명을 잃는 것이고 ‘은사’에 대한 믿음은 말 그대로 ‘망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동행 2020.06.14

조지 플로이드 동영상,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2020년 6월 13일)

무릎으로 흑인의 목을 누르는 백인 경찰의 행위를 촬영한 동영상이 없었다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지금처럼 세계적 공분을 일으키지 못했을 겁니다. 이 동영상을 촬영한 건 흑인 여고생 다넬라 프레이저라고 합니다. 그 상황을 목격했을 때 프레이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백인 경찰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면 그들에게 큰 봉변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그를 구해야 하는 건 누구나 알지만구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조지 플로이드가 여러 가지 나쁜 짓을 저지른 전과자이니 그를 '인종차별에 희생된 흑인 영웅'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이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는 '영웅'이 아니고 '피해자'입니다.한 가지 ..

동행 2020.06.13

라파예트 광장 (2020년 6월 10일)

텔레비전 뉴스에서 잘난 척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볼 때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복잡한 사회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지성인과 정치꾼과 무지한 다수, 무엇보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 때문에 미국이 이루는 성취에 전폭적 지지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최근 트럼프의 지지율은 37~8 퍼센트를 기록했는데, 이 지지율은 재선에 실패한 전임 대통령들이 선거가 있던 해 이맘때 기록했던 지지율이라고 합니다. 트럼프의 행보 덕을 보고 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 바이든(Joe Biden)은 함량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트럼프도 미국 대통령을 했으니 바이든이라고 못할 것도 없겠지요. 대통령에 따라 달라지는 백악관 북쪽 라파예트 광장의 풍경...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여적]라파예트 광장 조찬제 논설위원 미국 백..

동행 202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