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13

노년일기 231: 포옹 남녀 (2024년 9월 30일)

일요일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네 카페들은 대개 교회와성당을 다녀온 사람들이 뒤풀이하는 장소로 쓰이니까요.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래도그리로 갔습니다. 교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한 두 청춘남녀는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빈자리라고는 그 남녀의옆 테이블뿐이라 거기에 앉았습니다. 보려 하지 않아도 그들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로 유명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말처럼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두 사람은 테이블 한편의 두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코감기에 걸린 듯한 남자는 연신..

동행 2024.09.30

<리처드 3세> 2: 슬픔과 명예 (2024년 9월 28일)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는 재미의 으뜸은 주인공이 아닌주변 인물들이 인생의 진실을 얘기하는 데 있습니다.사형 집행인이나 감옥의 간수, 몸종 같은 사람들이지요.아래는 1막에서, 탑 감옥의 간수 브라켄베리가감옥에 갇혀 있는 클라렌스 공작, 즉 조지 왕자와 대화한 후혼자 하는 말입니다. 지난 25일에 올린 글의 인용문처럼, 아래 글도 대충 번역해 옮겨 둡니다. 원작에는 오늘의 인용문이 25일의 인용문보다 먼저 나옵니다.  Sorrow breaks seasons and reposing hours,Makes the night morning and the noontide night.Princes have but their titles for their glories,An outward honour for an inw..

오늘의 문장 2024.09.28

<리처드 3세> 1: 양심은 위험해 (2024년 9월 25일)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의 글을 읽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엔 과 을읽으며 설렘과 스릴을 느꼈고, 나이 들면서는 을 읽으며 분노와 슬픔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지난달 생일 선물로 받은 (리처드 3세)>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두 번째로 긴 작품입니다. 가장 긴 작품은이지요. 5막으로 구성된 의 1막에 탑에 갇힌왕자를 살해하라는 명을 받고 온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I'll not meddle with it, it is a dangerous thing,it makes a man a coward. A man c..

오늘의 문장 2024.09.25

운수 좋은 날 (2024년 9월 22일)

남녘의 비는 행패를 부렸지만 서울의 비는 대지를 식혀 어제는 오랜만에 살 만했습니다. 회색 하늘 아래를 걸어 좋아하는 카페에 갔습니다. 더구나 어제 근무하는 바리스타는 기복 없이 늘 맛좋은 커피를 만듭니다.  저처럼 비를 반가워한 사람이 많았는지 카페엔손님이 많았습니다. 비어 있는 테이블은 오직 하나.왼쪽 작은 방에 이어져 놓인 4인석 테이블 두 개 중 안쪽 테이블엔 젊은 여성 넷이 앉아 있고 바깥 테이블만비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잠깐 망설였지만, 제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걸 다행스러워 하며 웃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니 그냥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옆 테이블 여성 중 한 사람의 짐이 제 의자 옆 의자에놓여 있었습니다.  빈 테이블의 빈 의자에 짐을 놓는 일은 흔하지만 누군가 그 자..

동행 2024.09.22

노년일기 230: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19금)(2024년 9월 20일)

'나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적은 나를 강화시킨다'는 말이있지만, 이 말은 더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더위는 저를 죽이지 못했을 뿐, 저를 무기력하게 하고약화시켜 시간을 닝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케이블텔레비전에서 해 주는무료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는 호주 감독 소피 하이드 (Sophie Hyde)가 2022년에 발표한 '19금'로맨틱 코미디로, 영국이 자랑하는 배우 엠마 톰슨 (Emma Thompson)과  그녀보다 34세 어린 아일랜드 배우 다릴 맥코맥(Daryl McCormack)이 주연합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하는 전직 윤리 교사 낸시는 2년 전 남편과사별하고 홀로 사는..

동행 2024.09.20

영화를 지우는 나라 (2024년 9월 17일)

'추석'이라는 말 속의 '저녁 夕' 때문일까요?오늘 아침은 저녁 무렵 같습니다.구름에 가리었어도 보름달 님은 저 하늘에 계실 테니기도가 자꾸 길어집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무지를 덜어 주시고 무명(無明)을 깨뜨려 주소서! 명절 전야 TV도 볼 것 없기는 평소와 진배없었습니다.낯설고 낯익은 연예인들이 먹고 떠드는 화면을 피해 옛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며칠 전엔 '빠삐용'과 '백 투 더 퓨쳐'가반가웠습니다. 조폭들의 총질이 난무하지 않는 영화들을 보며눈물을 훔치고 박장대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옛 명화는 여전히 명화인데, 보다 보니 짜증이 났습니다. 대사가 지워지고 장면이 지워졌습니다. 저 영화를 만든감독들이 제 옆에 앉아 TV에 나오는 자신의 영화를 보았으면정부인지 누구..

동행 2024.09.17

지구: 플래닛 아쿠아 (2024년 9월 15일)

배달 오토바이들이 도시 곳곳을 누빕니다.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이 많다 보니 직장 생활을하기보다  배달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이가 많다고 합니다. 대개 꽉 짜인 일과를 보내야 하는 직장 생활에 비해 배달 일은근무 시간이 자유롭고 수입도 짭짤하다고 합니다.물론 오토바이 사고가 나면 큰일이지만, 사람들은 '은사 망상'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에겐 사고가 나도자신에겐 사고가 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배달 공화국'답게 이 나라 TV에 나오는 밥상 위엔 그릇들 대신 배달 음식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들이 놓여 있습니다. 소상공인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배달료를 보조해 주는 이 나라에서는, 환경단체나 정부도  배달 음식이나 배달 음식용 플라스틱 용기에 환경분담금을 부과해야 한다거나 다회용 용기를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

동행 2024.09.15

부은 얼굴 (2024년 9월 14일)

울고 난 눈이 통통 부어 볼 만합니다.하늘도 한참 울었지만 하늘은 울기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데...  올고 난 사람 눈은 붓는데 하늘 눈은 왜붓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소금 때문인 것 같습니다.지상의 생명체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소금을 필요로 하지만, 하늘은 신체에 갇히지 않으니소금 또한 필요하지 않겠지요.    나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하늘을 꿈꿉니다.45억 살을 먹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저 얼굴의 비밀을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붓지 않는 저 얼굴의 비밀을...

나의 이야기 2024.09.14

노년일기 229: 비님 목소리 (2024년 9월 12일)

더위 끝 빗소리가 잠을 깨웁니다.창밖에선 달구어졌던 세상이 식고 있습니다.나무, 건물, 자동차 모두 행복하게 젖습니다. 비가 자꾸 무어라 두런거립니다.어둠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이니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반가운 것들은 늘 미안해합니다.비도, 꽃도, 사람도, 가을도... 어제까지 새벽을 울리던 가을벌레들은 침묵한 채 빗소리의 변주를 듣고 있습니다. 진짜 음악가들은 압니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을. 세상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것,아이러니 때문일 겁니다.긴 더위를 식혀 주는 비가 오히려 늦게 온 것을미안해하고, 청아한 가을벌레들이 오히려 침묵하고...  공부하며 사는 사람은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책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나쁜 부모가 자..

나의 이야기 2024.09.12

상실의 기술 (2024년 9월 9일)

삶은 성취의 기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삶은 상실의 기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만남의 기록이라고 하는 걸다른 사람은 이별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문학은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데서 출발했을지 모릅니다. 며칠 전 20세기 미국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 (Elizabeth Bishop: 1911-1979) 의 시 'One Art (한 가지 기술)'를읽다가, 제가 잃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많은것들을 잃고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그렇게 많은 것들을 잃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가진 것이많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비숍의 말대로 '상실의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은어렵지 않겠지만, 상실이 낳은 기억은 우리와 함께 살다가우리와 함께 사라지겠지요. 아니면 하늘을 나는 연처..

오늘의 문장 2024.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