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 12

노년일기 187: 아이러니 (2023년 8월 30일)

가끔 '저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음식점만은 안 했으면 좋겠어' 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일은 다 해도 좋으니 아기 돌보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음식점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할 때는 대개 그 사람이 깔끔하지 않거나 인상이 너무도 험악하여 소화불량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을 때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아기 돌보는 일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맡은 일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 일만은 안 했으면 좋을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가족 덕에 매일 병실에 드나들며 다양한 환자들과 의료종사자들을 접하다 보니 ..

동행 2023.08.30

노년일기 186: 당신을 생각합니다 (2023년 8월 28일)

칠십여 년 생애 처음으로 병원에서 밤을 보내게 된 당신을 생각합니다. 수전 손택은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고 했지만, 당신을 입원시킨 질병은 무수한 해석을 품은 은유이겠지요. 당신은 평생 생각해 보지 않았던 당신의 몸에 대해 생각할 겁니다. 당신은 잊고 살다시피한 당신의 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할 겁니다. 그 생각이 당신의 이성을 고양시키길, 우울이나 비관을 부추기진 않기를 바랍니다. '제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빨랐던 당신이니, 당신의 몸은 제 몸의 서너 배쯤 일해야 했을 겁니다. 부디 당신 몸의 노고를 위로해주길 바랍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은 다양한 '처음'을 경험하겠지만, 어떤 '처음'에도 겁먹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전에 겪었던 모든 처음들처럼 지금 겪는 처음들도 곧 익숙해질 테니까요. 아무..

동행 2023.08.28

노년일기 185: 칠순 잔치 (2023년 8월 27일)

회갑, 칠순...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로 생각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연세가 되고 마침내 내 것이 되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칠순: 일흔 살'이라는 정의 아래 "옆집 할머니께서는 칠순이 훨씬 넘으셨는데도 아직 정정하시다."는 예문이 있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어머니가 두 딸의 생일을 맞아 호텔 식당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저는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호텔이 동네에 있고 한 주에 생일을 맞은 동생이 가자고 하는데다 외출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이달 초부터 갑자기 외출 불능 상태가 되셨던 것을 생각해 가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새 많이 호전되시어 느리게나마 다시 걷게 되셨습니다. 네 사람이 모이니 식탁 위엔 네 가지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직원들의 서비스와 상관없이 음식은 훌륭했습니..

나의 이야기 2023.08.27

노년일기 184: 우리는 하나 (2023년 8월 24일)

노년은 발견의 시기입니다. 내 몸에 이렇게 많은 기관이 있었던가, 이렇게 다양한 고통이 숨어 있었던가... 끝없이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손목에서 어깨 사이 어디를 눌러도 아픕니다. 무릎과 발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내야지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먹으면 배를 채우고 있는 각종 장들이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혼자 샤워를 하실 수 없게 된 어머니를 씻어 드리고 오면 제 몸 이곳저곳에 파스를 붙이고도 밤새 끙끙 소리를 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도 대개 몸의 불평을 듣습니다. 타고난 튼튼 체질 덕에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갑자기 태업에 들어간 당신의 다리를 내려다 보며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탄식하십니다. 젊은 시절 훈련 한 번 받지 않고도 기록적 속도로 100미터를 주..

나의 이야기 2023.08.24

노년일기 183: 사랑 때문에? (2023년 8월 20일)

몇 군데 돈을 보내야 할 곳이 있어서 텔레뱅킹을 하는데, 암호 숫자를 두 번이나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세 번 잘못하면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는 투의 ARS 협박을 들었습니다. 마트에 생강을 사러갔습니다. 흙생강은 100그램에 2,300원인데 바로 옆 '깐 생강'은 698원이라기에 한 봉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 찬물로 땀을 씻고 나서야 698원이 아니라 6980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본래 숫자에 어둡고 눈도 몹시 나쁘지만 깐 생강이 흙생강보다 비싼 게 당연한데 그런 실수를 하다니... 부끄러웠습니다. 저녁밥을 해 주겠다는 아들에게 찬밥이 많으니 달걀볶음밥을 해 달라고 했는데 아들이 밥을 볶으려 하니 찬밥이 없었습니다. 찬밥 있던 것을 점심에 먹고도 냉장고에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다행히 텔레뱅킹 ..

나의 이야기 2023.08.20

조문을 놓치다 (2023년 8월 19일)

젊은 시절엔 매일 죽는다는 사실로부터 위로 받았지만 머리가 하얘진 후로는 이달처럼 죽음을 가까이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재해로 인한 사망, 젊은이들의 사고사와 돌연사, 어머니의 입원과 노쇠한 어른들에 대한 걱정 등이 끝없이 죽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다 정작 중요한 사별의 자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카톡 사용자였으면 알았을지도 모르는데 섬처럼 살다가, 가시는 분께 마지막으로 인사 올리고 그분의 아들을 위로할 기회를 놓친 겁니다. 기억은 조문보다 오래가니 기억으로나마 오늘의 송구함을 덜어볼까 합니다... 툭 툭 던지는 듯한 말투로 여린 마음을 애써 감추시던 그분... 그분을 생각하며 기도하다 보니 눈이 젖어옵니다. 마침내 고단하고 외로운 생애를 벗어나신 우말순 여사님... 최선을 다하셨으니 부디 자유와 평..

나의 이야기 2023.08.19

노년일기 182: 닮은 눈 저편 (2023년 8월 15일)

8월 한가운데 햇볕 쨍쨍한데 우리 엄마 또 주무시네 기쁨 슬픔 원망 분노 감긴 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네 아프네 아프네 하지만 정말 죽을 때 되면 아픈 데 없다더라 하시더니 눈 뜬 엄마 아픈 곳 없다네 얼마 전만 해도 서운한 것 많더니 이젠 8년 전 떠나가신 아버지 얘기뿐 그 옆에 가 누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왜 안 가는 걸까 뭐가 그리 급하셔요 천천히 가셔요 엄마 가시면 나는 고아 되는데 불효한 딸은 엄마 닮은 눈 저편에 눈물 숨기며 엄마 발을 붙드네 https://www.youtube.com/watch?v=PwbdzarEoNg&ab_channel=JHChung

나의 이야기 2023.08.15

'마중'해야 '배웅'한다 (2023년 8월 14일)

2주 전인가 '나는 솔로'를 보다가 '뭐지?' 했던 적이 있습니다. 먼저 만남의 장소에 도착해 있던 사람이 새로 온 사람을 맞이하며 자신이 '배웅'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중'이라고 해야 할 때 배웅이라고 하는 게 매우 이상했지만 너무 긴장해서 실수하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후에도 마중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경우 언제나 배웅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놀라웠는데 더 놀라운 건 그 사람의 '자기 소개'였습니다. 어른들의 단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나 어울릴 '마중'과 '배웅'의 혼동을 거듭한 그 사람이 소위 서울 명문대 출신의 직장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실수 -- 같은 실수를 두 번 이상 하면 '실수'가 아니고 '실력'이라 하지요..

동행 2023.08.14

찰나를 위한 기도 (2023년 8월 11일)

후두둑... 쏴아... 자박자박... 빗소리는 세상의 소리를 지우고 일찍 깬 새벽은 늙은 구도자처럼 울먹이며 기도합니다. 저 비에 젖는 모든 것들을 동정하소서, 자라는 것들과 자라지 못하는 것들 모두의 목마름을 달래 주소서. 존재의 유한함을 각성하여 무한한 순간을 살게 하소서. 이국으로 치닫던 발길 되돌려 제 안으로 자박자박 들어가게 하소서. 이윽고 사랑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QS2QVXh9Mb8&ab_channel=JimmyStrain-Topic

나의 이야기 2023.08.11

노년일기 181: 천사를 만난 시간 (2023년 8월 9일)

나이가 쌓일수록 장례식장 방문도 늘어납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나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장례식장은 심오한 교육이 행해지는 교실입니다. 그 교실의 어떤 학생들은 말이 없지만, 어떤 학생들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집니다. 죽음의 힘은 사람의 행태도 바꾸나 봅니다. 어제 일산의 한 장례식장에 찾아갈 때는 그 어느 장례식장에 갈 때보다 힘겨웠습니다. 죽은 사람이 겨우 서른 넷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전화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순간엔 숨을 쉬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늦게 결혼한 친구의 아들로 실력 있는 스케이트 선수로서, 핸섬하고 다정한 선생님이자 코치로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직장 가까운 데서 홀로 살다가 돌연사했다니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나의 이야기 2023.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