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어머니의 팥죽 (2007년 12월 28일)

divicom 2009. 11. 19. 12:02

원래 부지런한 어머니지만 동짓날 아침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붉은 팥에서 못난 것을 골라내고 씻습니다. 잡귀 없는 한 해를 보내려면 잘 생긴 붉은 팥만 써야 합니다. 직업이 일정치 않은 남편과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느라 어지간히 어렵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붉고 좋은 팥만 고집했습니다. 어머니에겐 가족이 종교이니, 팥알 하나하나는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팥을 불에 올려놓고 찹쌀을 씻어 불립니다. 혹시 찹쌀가루가 남으면 쇠머리 찰떡을 하려고 서리태도 깨끗이 씻어 물에 담가 둡니다. 반들반들 까만 콩이 아이들 어릴 적 눈빛입니다. 곡식이 물을 먹어 몸을 키우는 동안 어머니는 오랜만에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펼칩니다. 대통령 선거 뒤끝이라 맨 정치 얘기입니다. “정치가 뭐 길래, 쯧 쯧...“

함께 사는 큰 며느리가 어느새 방앗간에 다녀왔나 봅니다. 돌돌하던 찹쌀이 하얀 가루가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며느리와 새알심을 빚습니다. 아들과 결혼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며느리는 돌아오는 3월에 며느리를 봅니다. 작은 몸, 작은 손으로 두 아이를 낳아 키운 며느리는 딸이 된 지 오랩니다.

아이들이 동지인 걸 알고는 있을까? 어머니는 차례대로 전화를 걸어봅니다. 늙어가는 아이들은 이미 어머니의 팥죽을 기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가슴 한쪽이 아릿합니다. 떡 맛, 팥죽 맛, 밥 맛, 물맛까지 알면 인생을 다 아는 거니 말입니다. 팥물에 쌀을 넣어 끓이다가 새알심을 집어넣습니다. 아이들은 생긴 게 다른 것처럼, 성격도 식성도 다릅니다. 밥이 들어간 팥죽을 좋아하는 아이, 새알심이 많은 팥죽을 좋아하는 아이, 알맹이보다는 국물을 좋아하는 아이...

평생 적게 먹기로 유명한 남편과 큰 아들이 동치미를 곁들여 팥죽을 두 그릇씩 해치우고 각자의 방으로 간 후, 끝물 감기를 단 큰 딸이 들어섭니다. 어려선 입이 짧고 팥이라고는 안 먹던 딸이 팥죽을 세 그릇이나 비웁니다. “아, 맛있어, 어제부터 팥죽 생각이 났어요.”

찜통에 베 보자기를 깔아 떡 찔 준비를 합니다. “이 베는 진짜 삼베지만 이쪽 건 삼베에 뭘 섞은 거야. 나 죽거든 진짜 베 한필 끊어다 둘둘 말면 돼. 묻어도 그렇고 태워도 그렇고, 진짜 베라야 잘 썩고 잘 타거든. 베도 베지만 병원 수의는 너무 여러 겹이야. 그게 무슨 낭비야? 절대 그렇게 하지 마.” 여든이 코앞이니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합니다. “죽은 후 일, 뭐 하러 걱정한대...” 남의 얘기하듯 하면서도 “진짜 베는 어디 가야 구해요?” 큰 딸이 묻습니다. “동대문 시장.” 딸이 얼른 화제를 바꿉니다.

판판한 베 위에 새알심을 만들고 남은 가루와 불린 콩을 깔아 떡을 찝니다. 콩 익는 냄새가 날 때 작은 아들 내외가 아이들과 함께 들어섭니다. 고등학교 때 통통하던 큰 손녀가 대학생이 된 후 날씬한 미녀가 되었습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식성대로 팥죽을 먹습니다. 작은 아들네 그릇이 빌 때 둘째딸이 두 아이를 몰고 들어옵니다. 딸의 얼굴이 밝은 걸 보니 재수한 아들의 성적이 나아졌나 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의 얘기가 끝이 없습니다. 큰 딸이 어디에 발표한 글을 놓고, 큰 아들은 “독하게 썼네,”하고 작은 아들은 “좀 더 독하게 썼어야하는데” 합니다. 작은 아들 내외는 김장하는 날 부부싸움을 하고 그날 밤에 여행을 떠나 영주 부석사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둘째 딸네 아들이 지원해야할 대학을 놓고 설전이 벌어지니, 모두 대학 홍보처의 직원들 같습니다.

팥죽과 흰 밥이 어우러진 저녁상, 친구들 모임에 갔던 큰 사위가 때 맞춰와 팥죽을 두 그릇이나 비우더니 장인과 바둑을 두러 들어갑니다. 다시 이야기판이 벌어져 시끄러울 때, 태안 해변에 기름 닦으러 갔던 막내딸 내외가 들어옵니다. 딸의 얼굴엔 고단함이 역력한데도 “사람이 많이 와서 별로 일도 않고 왔어요” 합니다.

예인선 회사와 기름 회사를 비난하던 아이들이 대통령 선거 얘기를 합니다. 정치판이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지만, 오지 못한 둘째 사위와 큰 딸네 아들에게 보낼 팥죽을 담느라 어머니는 속으로만 동의합니다.

바둑 두던 큰 사위가 나오고 거실의 아이들이 옷을 찾아 입는 걸 보니 파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엄마,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여러 목소리가 같은 말을 남기고 푸른 밤 속으로 흩어진 후에도 어머니는 아직 속셈중입니다. 깜빡 빠뜨린 아이는 없는지, 싸주어야 할 것을 잊은 건 없는지... 아이들이 남기고간 밤이 아직 화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