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청계천 판자촌 (2007년 11월 23일)

divicom 2009. 11. 19. 11:54

청계천이 2년 2개월의 공사를 통해 복원된 지 2년 2개월이 지났습니다. 잘한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못한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3,900억 원이 소요되었다는 복원 사업의 공과를 따질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새 단장을 한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거기서 풍겨 오는 인공의 냄새가 오히려 옛날 청계천 풍경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풍경의 주류를 이루는 건 각종 공구상工具商들과 헌 책방들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고민이 다 제 것 같던 사춘기시절부터 20대 초입까지 청계천은 늘 제 2의 학교와 같았습니다. 헌 책방 가는 길에 먼저 나타나는 공구상들엔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기계들과 씨름하는 늙고 젊은 남자들이 멋졌습니다. 단단한 공구들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그분들의 앞을 지나노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덜 여문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공구상들의 길이 끝나고 나면 헌 책방들이 어깨를 겯고 늘어서 있었습니다. 헌 책마냥 무심한 듯 친절한 책방 주인들은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괘념치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어깨를 안아주는 친구 같은 헌 책방들, 대학을 떨어진 후 제일 먼저 간 곳도 거기였습니다. 그곳에서 산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들과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저작들에 기대어 음울한 재수 시절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건 서울시가 최근에 발표한 “문화ㆍ디지털 청계천 프로젝트”의 테마가 그 헌 책방들도 공구상도 아닌 판자촌이라는 겁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살려 공동 수도, 물지게, 연탄 리어카 등 “당시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잡화점, 만화 가게, 연탄 가게 등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판자촌은 복원하여 체험해야 할 과거의 풍경이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서울시 공무원들에겐 낭만이 되어버린 3,40년 전 판자촌의 삶은 아직 적지 않은 우리 이웃들의 현실입니다. 나라의 지도를 바꾼 빠른 경제발전은 한편으론 비정한 엄마와 같았습니다. 바쁘게 달리는 엄마의 손목을 놓친 미아들처럼 판잣집들은 마천루의 그늘에 엎드려 있습니다.

송파구 송파대로변 복정역 인근에 있는 장지동 화훼마을에만 해도 190 가구 4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판자촌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서울시가 청계천변에 복원하려는 풍경이 있고 그 속에서 유지되는 진짜 삶이 있습니다. 수돗물은 1999년부터 들어오고 있지만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구멍 가게는 있어도 편의시설은 없습니다. 어쩌면 한가지 다른 점이 있을지 모릅니다. 테마촌 판자집 벽엔 이곳 판자집들 벽마다 붙어 있는 빨간 소화기가 없을 테니까요. 한때 꽃과 채소가 가득하던 이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린 잦은 화재를 증언하는 소화기들 말입니다.

건설교통부가 지난 5월에 실태 조사한 것을 보면, 화훼마을 외에도, 강남구의 구룡마을과 수정마을, 서초구 잔디마을, 송파구 개미마을 등에서 서울시가 복원해내려 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곳 주민들 열의 여섯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주민등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법 무허가 집에는 주민등록을 해줄 수 없다는 게 관계당국의 얘기랍니다.

평균 평수 17평, 방이 한두 개인 집이75.4%, 그나마 자기 소유인 경우는 3%, 평균 거주기간은 14.3년. 대부분의 주민들에겐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기회가 없었고, 기회를 가졌던 소수의 주민들은 임대보증금과 임대료 때문에 입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주 잊혀졌던 판자촌이 대통령 선거 덕에 간간이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지난 화요일엔 대통령 후보 이 명박씨가 경기도 고양의 토당동 판자촌에서 연탄을 나르며 "금년이 지나 내년이 되면 아주 따뜻한 세상이 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또 다른 후보 정 동영씨는 같은 날 소기업상공인 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왕십리 판자촌에 살면서 옷을 만들어 내다팔던 시절을 회상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 해도, 또 아무리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해도, 그 한 켠에는 늘 풍요와 발전에서 소외된 삶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나라는 그 그늘진 삶에 햇볕이 들게 하는 정책이 있는 나라이며 그런 정책을 만들어내는 공무원들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피폐한 이웃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긴커녕 구경거리로 만들려 하니 무례하고도 잔인합니다.

지금이라도 청계천 프로젝트의 테마촌을 헌 책방이나 공구상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아니 아예 청계천을 따라 헌 책방촌을 복원하면 어떨까요? 헌 책에서 풍기는 사람의 향내가 청계천의 시멘트 냄새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