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테리 앤더슨을 추모함 (2024년 4월 25일)

divicom 2024. 4. 25. 09:09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로 15년을 살고

10여년 동안 신문방송에 칼럼을 연재했지만, 

진실을 보도하려 애쓰다 죽기 직전까지 가거나

영어(囹圄)의 몸이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테리 앤더슨(Terry Alan Anderson:

1947-2024) 같은 기자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거지요.

지난 21일 영면에 든 앤더슨씨의 자유와 평안을 기원하며

동아일보 김승련 논설위원이  '횡설수설' 칼럼에 쓴

글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0423/124622749/1

 

 

 

 

 

1980년 5월 광주의 한 모텔에 몇몇 외국인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모텔 창문 밖으로 멀리 저항에 나선 광주시민들이 보였고, 신군부

진압부대도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모텔에서 6m쯤 떨어진

옆 건물 옥상에 총을 든 군인이 나타나더니 기자들에게 손짓하며

떠날 것을 요구했다. 잠시 후 모텔방 유리창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들었다. 한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창밖 촬영을 시도했다.

총알이 더 날아들자 기자들은 바닥을 기어서 빠져나왔다. UPI통신

기자가 1989년 미국 LA타임스에 쓴 5·18민주화운동 취재기에 담긴 내용이다.

▷어떻게든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꺼내 든 이는 AP통신 도쿄지국

테리 앤더슨 기자(당시 33세)였다. ‘뉴스 현장’을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그로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밀었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선

희생자 수를 두고 논란이 컸다. 신군부는 초기에 3명이라고 발표했고,

시민들은 261명이라고 주장했다. 앤더슨 기자는 거리 취재 때 시신을

직접 셌다. “그렇게 많은 시신은 처음 봤다”며 하루에 179구까지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왜 굳이 세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기자는

원래 그렇게 일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앤더슨 기자가 지난 주말 미 뉴욕주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세상에 더 알려진 것은 광주 취재 5년 뒤 AP통신 중동지국장으로

일하던 때 내전 중이던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에게 납치된 일 때문이다.

그곳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료와 테니스를 친 어느 날 괴한 3명에게

끌려갔다. 이들은 영어로 “걱정 마라. 이건 정치적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2454일, 6년 8개월 동안 그는 인질이 됐다.

▷훗날 쓴 ‘사자굴’이란 회고록에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대부분을

눈이 가려진 채 지냈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몇 시간씩 기도하며

버텼다고 썼다. 당시 약혼녀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때 태어난 딸은

여섯 살이 되어서야 사진으로만 보던 아빠를 만났다. 그는 귀국 후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 정부를 상대로 1억 달러(약 140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액수가 밝혀지지 않은 큰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 돈으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을 위해 학교 50개를 지었다.

▷언론을 떠난 그의 삶은 대학 강의와 자선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바논 근무 시절 “분쟁지역 취재는 내 삶에 가장 매혹적인 일”이라고

했던 대로 ‘현장을 지킨 기자’로 기억될 것이다. 민주화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고, 남들은 피하는 중동의 분쟁지역을 지켰다.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는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꽂힌 검은 볼펜과

빨간펜이 눈에 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현장 기자라면

누구나 그랬을 모습 그대로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