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20세기의 부음(2016년 10월 11일)

divicom 2016. 10. 11. 07:35

얼마 전부터 부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20세기의 사람들이 떠나가며 그 세기가 '진짜로' 끝나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도로는 21세기에 들어선 지 16년이 되었지만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아직 21세기가 당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쩜 이런 생각 때문에 이 사회가 여전히 20세기적 우행을 거듭하고 있는 걸까요? 


김수종 선배가 자유칼럼에 쓰신 '20세기를 지우는 부음들'을 읽다보니

진짜 21세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절반은 20세기 사람이고 절반은 21세기 사람인 저...

20세기는 갔지만 21세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저는 한층 더 새롭게 자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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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지우는 부음(訃音)들

2016.10.05


시몬 페레스 9월 28일 향년 94세, 아놀드 파머 9월 25일 향년 87세, 이호철 9월 18일 향년 84세, 샤미언 카 9월 17일 향년 74세, 그레타 프리드만 9월 8일 향년 92세, 조 서터 8월 30일 향년 95세, 구봉서 8월 27일 향년 90세, 박형규 8월 18일 향년 94세.

지난 8월 15일 이후 신문의 부음 뉴스난을 메운 주인공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죽는 사람 숫자는 연간 5,000만 명이 훨씬 더 될 것입니다만, 무언가 세상에 큰 흔적을 남기고 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귀에 익고 눈에 익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역사의 굽이를 회상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위의 사람들은 20세기 어느 시점에서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며 우리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심은 사람들입니다.

코미디언 구봉서는 1960~1980년대 한국인들에게 웃음을 만들어주었던 코미디계의 대부였습니다. 1969년 MBC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구봉서는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서민들이 잠시 넋을 놓고 마냥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었던 코미디언이었습니다. 시대를 비판하는 그의 풍자 코미디는 권위주의 시대의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탄산수와 같았습니다.
  
소설가 이호철은 20세기 후반 남북분단, 한국전쟁, 산업화, 도시화의 격랑 한가운데서 헤엄쳤던 문학가였습니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 시대 언어를 만들고 시대정신을 규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이호철은 이 역할을 120% 해낸  창작자였습니다. 부산 피난도시의 무기력한 삶을 그린 ‘소시민’과, 3천만 국민이 서울로 몰려드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풍자한 ‘서울은 만원이다’는 그 제목 자체가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한국의 반독재 및 민주화 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대적(epoch) 인물입니다. ‘길 위의 목사’로 통하던 그는 1973년 부활절 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가 구속된 이후 6번 옥살이를 했을 정도로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했던 당시 그는 재야 및 종교계의 반체제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분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 후 그는 이스라엘군을 공포의 군대로 단련시켰으며 핵무기 개발의 숨은 공로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군사력을 토대로 한 아랍과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현실적 평화주의자였습니다.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는 오슬로협정을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합의하고 1993년 미국 백악관 뜰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 PLO의 아라파트 의장과 함께 협정에 서명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페레스 등 이들 3인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오슬로협정이 체결된 이후 평화와 전쟁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펠레스는 그리스 철학자를 인용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평화가 왔을 때는 청년이 노인을 장사지내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노인이 청년을 묻습니다.”

한국인들은 아마 아놀드 파머의 죽음이 시몬 페레스의 죽음보다 더 실감 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은 프로 골프가 꽃핀 시절이었고, 프로 골프의 전성기를 견인한 것은 아놀드 파머였습니다. 파머는 1958년 마스터스 챔피언이 된 후 1964년까지 일곱 시즌 동안 마스터스 4회, US오픈 1회, 브리티시오픈 2회 타이틀을 휩쓸면서 골프를 미국의 대중스포츠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골프장 레슨 선생을 하던 아버지로부터 골프를 배운 파머는 공이 어디에 놓여 있든 거침없는 샷을 휘둘러 관중을 흥분시켰으며 그의 팬은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초등학생에까지 전 연령대를 포괄했습니다. 골프장의 갤러리(구경꾼)를 본격적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아놀드 파머의 매력이었습니다.

파머는 그의 인기를 사업에 연결해 ‘골프재벌’이 되었습니다. ‘아놀드파머엔터프라이즈’ CEO가 되어 골프장 설계에서 골프복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업을 벌였고 TV골프채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4일(한국시간 15일) 사진 기자 알프레드 아이젠스태트는 뉴욕의 타임스광장에서 해군 병사와 간호사가 키스하는 장면을 찍어 ‘라이프’ 잡지의 커버스토리로 보도했습니다.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란 제목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간 이 사진은 20세기 최고 걸작이자 최고 키스 장면으로 지금도 세계인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사진 기자 아이젠스태트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속의 남녀 주인공이 누구냐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고 11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사진 속의 남자(여자)는 나”라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레타 프리드만은 1960년대에야 아이젠스태트의 사진책에서 그 사진을 보고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나섰습니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종전을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나를 꽉 껴안았고 키스한다는 것을 못 느꼈습니다. 로맨틱한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고 술회했습니다.

프리드만이 이 사진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무도 확인해줄 수는 없습니다. 사진 기자는 물론 상대방 남자도 다른 두 여자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격변의 시대에 거리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2차 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그 사진의 주인공이 세기의 인물이 된 것은 20세기 매스미디어 시대의 기이한 현상 중 하나였습니다.

‘샤미언 카’는 디자이너로 살았던 미국 여성입니다. 노년의 얼굴을 보면 그가 한때 아역 배우였다는 게 의심될 정도로 쭈글쭈글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1965년 개봉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의 큰 딸 ‘리즐’을 어렴풋이 기억할 것입니다. 줄리 앤드류스의 열연에 가려진 채 한낱 사춘기 소녀 역을 맡은 조연에 불과했지만 고전 영화 팬들은 카가 ‘사운드 오브 뮤직’ 가족의 첫 사망자라는 점에서 애잔한 향수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 한국인도 샤미언 카는 잘 모르지만 그 영화의 진한 감동을 기억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국 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 프로그램에서 줄리 앤드류스를 비롯한 폰 트랩 대령 가족으로 출연했던 아역 배우들을 전부 모아 대담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장성한 모습으로 변한 아역 배우들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영화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밤하늘의 별같이 찬란하게 빛나다 사라지는 정치인, 배우, 가수도 있지만 연구실이나 작업실에서 조용히 살다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대한 항공기 엔지니어 조 서터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20세기 후반 민간항공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최고의 걸작 비행기를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가 설계한 비행기를 타고 즐거운 해외여행을 할 것입니다. 서터가 만든 비행기가 바로 보잉747 점보 여객기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 공군 1호기나 한국 대통령이 타는 공군 1호기도 보잉747 모델입니다.

조 서터는 보잉항공사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가 40여년을 근속하고 엔지니어 담당 부사장까지 역임한 사람입니다. 서터는 틈만 나면 종이냅킨 위에 낙서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는 2층 비행기를 냅킨에 그리곤 했습니다.

보잉747이 나오기 전까지 대표적 제트 여객기는 보잉707이었습니다. 1958년 처음 나온 보잉707은 엔진이 2개 달린 110인 승이었습니다. 록히드와 보잉 등 항공기 제조사들은 대량 수송능력과 긴 항속거리를 지닌 군용기, 화물기, 여객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1966년 보잉은 엔지니어팀을 구성했고 서터가 그 설계 및 제작 책임을 맡았습니다. 식당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에 낙서했던 비행기 모습이 실물 비행기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서터는 2년 5개월에 걸쳐 4,500명의 엔지니어를 동원하여 보잉747의 설계와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시험비행에 들어간 보잉747-100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여객기의 2.5배나 컸으며 승객도 350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여객기로 탄생했습니다. 중간 급유 없이 8,500킬로미터를 날 수 있어 대륙 간 비행기로 더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 최대 민항 ‘팬암’이 기꺼이 보잉747을 뉴욕-런던 간 첫 비행에 투입했고 세계의 유수한 항공사들이 주력 항공기로 보잉747를 구매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김포공항 취재기자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가까이서 본 이륙하는 점보기는 너무 거대하여 그 육중한 기체가 공중으로 사뿐히 뜨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서터가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를 했는지 시험비행 활주로에서 점보기가 달리다 이륙하는 순간 바퀴가 지상에서 떨어지는 지점이 서터가 표시한 위치와 정확히 일치했다고 합니다. 점보기를 처음 탄 테스트파일럿은 “비행기는 이륙보다 착륙이 어려운데 보잉747은 저절로 알아서 착륙하는 것 같았다.”고 그 성능을 극찬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비행기가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피라미드와 에펠탑에 비견할 수 있는 현대 공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보잉747이 날기 시작한 지 거의 50년이 흘렀지만 여객기 개발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잉747은 여러 차례 개량 모델이 나왔고 현재 승객을 500명을 태우고 12,800킬로미터를 날 수 있는 모델이 나왔습니다,  조 서터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보잉747은 당분간 21세기의 하늘을 날아다닐 듯합니다. 그러나 아마존의 베조스와 스페이스X의 엘런 머스크는 민간의 화성 여행을 비즈니스 모델로 구상하고 있으니 우주 항공분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보잉747도 금세기 어느 시점에 옛 비행기가 되어 박물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쌓았던 흔적들은 점차 흐릿하게 지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근래 신문에 나는 부음을 보면 모두 20세기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세기는 사람들이 그어 놓은 선이지만 그 선의 이쪽과 저쪽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보면 새 밀레니엄을 말하던 때가 벌써 15년이 넘은 걸 실감합니다.

이 세상은 신문에 부음이 나는 유명한 사람들만 살다 가는 곳은 아닙니다. 모두 나름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의 시 ‘성공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연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였음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수월하게 숨쉬게 되는 것

이것이 성공하는 것이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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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