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김부겸과 제정구(2016년 4월 16일)

divicom 2016. 4. 16. 16:03

국회의원선거는 끝났지만 정치판은 연일 시끄럽습니다. 새누리당도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 당도... 어느 당도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승리한 사람은 대구 수성 갑에서 당선된 김부겸 씨를 비롯해 몇 사람뿐입니다. 한겨레신문의 김종철 선임기자가 그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해놓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김부겸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에게 배웠는데, 가장 큰 가르침은 제정구 전 의원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김부겸 씨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부합하는 미래를 살아주길 바랍니다. 나이 들어가며 추해지는 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대구의 김부겸'을 벗어나 '한국의 김부겸' 나아가서는 '한반도의 김부겸'으로 사고하고 활동하기 바랍니다. 아래에 한겨레신문 기사를 줄여서 옮겨둡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이나 문단이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기사 원문과 관련 사진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39952.html?_fr=mt1


'살아남은 자'의 책임으로 지역주의와 맞짱 뜬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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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이 지난 30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대구의 지역주의 벽을 마침내 깼다. 이강철, 유시민 등 내로라하는 역대 야당 실력자들도 실패했던 일이다... 5년 전인 2011년 12월 “월급쟁이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며 탄탄한 지역구(경기 군포)를 버리고 내려올 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 빨리, 그것도 압도적인 표 차이(김부겸 62.3% 대 김문수 37.7%)로 당선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김부겸이 제도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통해서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따낸 민주화 국면에서 김대중-김영삼 양김씨의 분열로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야권이 패배하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이듬해 총선(13대)을 앞두고 독자세력화한 정당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재야의 막내세대 김부겸도 한겨레민주당에 자연스레 참여했다. 이때 김부겸은 서울 동작갑에 처음 출마했지만, 미미한 성적을 얻는 데 그쳤다. 한겨레민주당이 실패한 뒤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은 민중당을 만들어 나가고,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등은 이른바 ‘꼬마민주당’(1991)에 합류한다. 1990년의 3당 합당(노태우·김영삼·김종필)에 반대한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 등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중심이 돼 만든 정당(민주당)으로, 소속 의원이 적어 꼬마민주당으로 불렸다.


김부겸의 본격적인 정치수업은 김대중이 이끄는 제1야당에서 시작됐다. 1992년 대선을 앞둔 1991년 9월 꼬마민주당이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평화민주당의 후신)과 합당을 한 데 따른 일이다. 이때가 김부겸으로서는 정치인생 제1막이다. 그는 노무현, 홍사덕 대변인 밑에서 부대변인으로 일했으며, 이어 당무기획실을 이끌던 제정구 아래에서 부실장으로 활약했다. 김대중이 ‘키워야 할 젊은 정치인 여섯명’ 가운데 한명으로 꼽았을 정도로 제1야당에서의 김부겸은 장래가 밝아 보였다.


이 시절 아찔했던 사건도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가 기획 발표한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다. 이선실이 사건 발생 3년 전 야당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김부겸에게도 장모를 통해 접근해왔다. 젊은 정치인을 도우려는 착한 이웃 할머니인 줄 알고 몇차례 만났고, 그 할머니가 집에 생활비로 사용하라며 500만원권 수표를 두고 갔다. 그 뒤 “혁명 대오”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그는 “나는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지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며 내쫓았다. 하지만 안기부는 그를 국가보안법의 간첩과의 회합, 금품수수, 불고지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법원에서 불고지죄 빼고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 총선에서 상대 후보 쪽은 이 사건을 끄집어내 구전으로 ‘김부겸이 간첩한테 돈을 받았다’고 색깔론을 펴기도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1992년 대선 패배 뒤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은 1995년 지방선거 한달 뒤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그러고는 신당 창당에 나섰다. 1997년 대선 출마를 향한 정치적 수순밟기였다. 제1야당 민주당의 쇠락은 불보듯 뻔했다.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김대중을 따라 탈당했고,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제정구, 김정길, 노무현 등과 함께 김부겸은 신당 창당에 반대하면서 민주당에 남는 쪽을 택했다. 대세보다는 명분을 좇았다. 이듬해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과천·의왕에서 출마한 김부겸은 16%를 받고는 낙선했다. 그가 속한 민주당도 당선자가 15명밖에 되지 않는 원외정당으로 하루아침에 전락했다... 당권을 쥔 이기택에 맞선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활동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이강철, 김정길, 김원웅, 원혜영, 박석무, 이철, 홍사덕, 이미경 등 야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인 통추에서 김부겸은 막내로 참가했다. 특히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이자 빈민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던 제정구는 김부겸의 정치적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1997년 11월 대선 직전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해서 소속 정치인들이 정치적 선택을 내려야 할 때도, 그는 제정구를 따라 합당으로 새로 생기는 한나라당으로 옮겨갔다.


김부겸은 제정구가 1999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남긴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순과 대립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라는 명제는 이제 불가능하다.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정치 행태도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는 상극이 아니라 상생의 시대가 될 것이다. 화해와 상생, 통합의 정치만이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다.” 김부겸이 타협과 절충을 중시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치, 공존의 정치를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삼은 것은 제정구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라당 시절은 김부겸에게는 ‘경계인’으로서 자리매김돼가는 기간으로 보인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경기도 군포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돼 오랫동안 그리던 국회에 들어갔지만, 김부겸은 당내에서 정체성 시비에 곧잘 시달렸다. 국가보안법 존속 당론에 맞서 의원총회에서 토론을 요구했다가 제지를 당하는 등 당론과 배치되는 의견을 자주 냈다. 그는 “제도 정치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지만, 두고두고 정체성 때문에 시비를 달고 살아야 했으니 내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인 셈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2015년)라고 이 시절을 회고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뒤에는 이부영, 이우재, 원희룡, 김영춘, 안영근 등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당풍 및 노선 쇄신운동을 시작했다. 한나라당을 내부에서 고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 주류인 보수파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공격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한나라당이 밀어붙이던 대북송금특검법에 대해 김부겸이 본회의장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김용갑 의원은 김부겸에게 “어이, 김부겸 의원, 평양에서 감사 전화 안 왔어?”라고 야유를 보내는 등 보수 주류는 그를 본격적으로 왕따를 시켰다. 결국 김부겸은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등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2003년 7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김부겸의 정치인생 제2막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한나라당 탈당파 5인과 민주당 탈당파 40인, 개혁당 출신 2인 등 47석의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김부겸은 사회를 봤을 정도로 새 출발에 기대를 걸었다. 남의 옷을 입고 있던 느낌이었던 한나라당을 떠나 이제야 제집을 찾은 듯했다. 2005년 정세균 원내대표 아래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아 일할 때만 해도 그는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복귀한 ‘정통 야당’에서도 그는 경계인이었다. 야당 주류는 김부겸에게 좀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수도권 3선 의원으로서 지명도가 있음에도, 전당대회 한번(2006년)과 원내대표 경선 세번 등 당내 선거에서는 번번이 낙선했다. 그때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10년 전당대회에서 손학규가 당 대표에 당선된 뒤에는 차기 사무총장을 맡을 것이 유력했지만, 손학규는 막판에 이낙연을 임명했다...


19대 총선(2012년)을 다섯달 앞둔 2011년 12월15일 김부겸은 기자회견을 열어 “저는 지금 지역주의, 기득권, 과거라는 세개의 벽을 넘으려 합니다. 그 벽을 넘기 위해 대구로 가고자 합니다”며 차기 총선 대구 출마를 선언했다. 더구나 유시민처럼 무소속도 아니고 제1야당 간판을 달고 나가겠다고 했다.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대구가 그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으나, 누가 봐도 낙선이 예상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구는 1988년 소선거구제로 변경된 이후 한번도 정통 야당 후보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은 야당 불모지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군포에 있었으면 국회의원 한두 번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김부겸으로 남길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성실한 의정활동을 한, 그럭저럭 괜찮았던 국회의원으로 끝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움직인 것은 부채의식이었다. 나는 국회의원도 했고 정치인으로 살아남았지만 꿈을 접고 응어리를 풀지 못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가슴 한가운데 묵직한 돌덩어리로 남아 있다. 그렇게 남은 삶에 대한 어떤 책임,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김부겸은 195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군 장교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이사 가서 고등학교까지 대구에서 지냈다. 고교(경북고) 시절까지 평범했던 그가 역사와 사회에 본격적인 눈을 뜬 것은 1976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뒤부터였다. 유신독재정권의 억압 구조 속에서 정의감이 강하고 열정 많은 청년 김부겸은 점차 치열한 학생운동가로 변해갔다. 2학년 때인 1977년 서울대 도서관 점거시위와 관련해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 대표로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 집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학생지도자가 됐다. 그해 5월 역사적인 서울역 집회(13~15일) 때 군부의 개입을 우려해 철수를 주장하는 학생회장단과 달리 그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맞섰다. 서울역 집회를 해산한 이틀 뒤 5·17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광주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시위 현장을 지켰던 내게 광주는 부채감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복받쳤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기점으로 시위 열기가 주춤하던 사이, 계엄군의 총부리가 광주로 향했다는 결과론적 원인 때문이다.”(<나는 민주당이다> 2011년) 80년 광주와 그 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은 아직도 김부겸을 밀어가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