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9

바람, '백세청풍' (2021년 5월 9일)

어제 낮과 밤을 뿌옇게 지웠던 황사가 오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비사막의 모래를 실어온 것도 바람, 시야를 다시 사진 속 풍경으로 되돌린 것도 바람, 새삼 바람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때론 스승이고 때론 친구인 책은 가끔 저를 놀래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빛 도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 후 바람의 위대함에 감탄하며 펼친 책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만난 겁니다. 그 책은 존경하는 문창재 선배님이 쓰신 입니다. 무심코 펼친 180쪽에 '백세청풍'이 있었습니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이 구절의 '따스한 손길'은 14대 심수관을 뜻합니다. 아시다시피 심수관(沈壽官..

동행 2021.05.09

비 냄새, 페트리코 (2021년 5월 7일)

살아 있어서 좋은 점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묘비나 지방(紙榜)의 망자 이름 앞에 '학생 學生'이 쓰이는 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배움을 그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배울 기회가 있다는 것, 이 기회에 감사합니다. 어젠 신문에서 영어 단어 하나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임의진 목사님이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임의진의 시골편지'에서 '페트리코 (petrichor)'라는 단어를 처음 본 것입니다. '영어로 밥 먹고 산 지 한참인데 이제야 이 단어를 만나다니!' 하는 부끄러움도 컸지만, 모르던 단어를 알게 된 기쁨이 더 컸습니다. 게다가 그 단어는 제가 라테보다 좋아하는 '비 냄새'를 뜻하니까요. 임 목사님의 글에도 나오지만, 'petrichor'는 '바위'와 '돌'을 뜻하..

동행 2021.05.07

묘비명 (2021년 5월 2일)

한때는 죽는 사람 대개가 묘에 묻혔습니다. 묘가 있으면 묘비가 있고 묘비명도 있었습니다. 묘비명 중엔 망자가 살아서 써둔 말도 있고 남은 사람들이 쓴 말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납골당이 묘를 대신하게 되면서 묘비도 묘비명도 현저히 줄었습니다. 묘비명이 사라지는 건 안타깝습니다. 묘비명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 남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나 당부 같은 말이니까요. 5월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님의 묘비명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모두와 함께 나눔'을 뜻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삼가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여적]추기경의 묘비명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고(故) 정진석 추기경 선종 나흘째인 30일..

동행 2021.05.02

늙은 아내가 늙은 남편에게 (2021년 4월 28일)

한 늙은 아내가 자신의 마흔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늙은 남편에게 시 한 조각을 보냈다지요. 그 시는 19세기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Christina Rossetti: 1830-1894)의 'The Convent Threshold (수녀원 문턱)'의 마지막 연이었다지요. 결혼기념일에 하필 수녀원 문턱 얘기라니? 세 번이나 결혼 문턱까지 갔으나 결국 혼자 살다 간 시인의 시라니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요. 게다가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사랑하는 이여 내가 죽거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오'로 시작하는 로맨틱한 시 'Song (노래)'을 쓴 시인이니까요. "If now you saw me you would say: Where is the face I use..

오늘의 문장 2021.04.28

용서는 왜 늘 피해자의 몫인가 (2021년 4월 25일)

관계를 관찰하다 보면 '왜 언제나 피해자가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건 가해자고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를 입었을 뿐인데 왜 용서는 늘 피해자의 몫일까요?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며 참회할 때는 그나마 용서하기가 쉽지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할 때조차 그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한마디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나은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피해자는 가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해자보다 나은 사람이니까요. 대개 사람의 관계는 상대적이고, 동등한 관계보다는 조금 어린 사람과 그보다 조금 (혹은 아주 많이) 성숙한 사람의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상처 입는 피해자는 늘 좀 더 성숙한 사람이겠지요. 초등학생 동생이 중학생 형을 때릴 때 동..

나의 이야기 2021.04.25

태어나는 게 행운이라고? (2021년 4월 23일)

창밖의 재스민꽃이 시들고 있습니다. 보라로 피었던 꽃이 하양이 되어도 향기는 변함없어 집안은 절간이었습니다. 시드는 꽃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시들다 말라 흙빛으로 떨어지면 나무는 꽃을 피운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푸른 잎만으로 남은 한 해를 버티겠지요. 다시 봄이 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보라꽃을 등처럼 거울처럼 내걸고 밤낮 흔들리는 마음을 비춰보라 할 겁니다. 만물 중에 사유를 부추기지 않는 것은 없지만 꽃처럼 태연하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도 드뭅니다. 죽음과 삶, 피움과 시듦, 종말과 순환, 반성, 약속... 재스민 향기를 맡다보니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1819-1992)의 시 '나의 노래 (Song of Myself)'가 떠오릅니다. '나의 노래'는 52편으로 쓰여진 시..

오늘의 문장 2021.04.23

사랑, 그리고 혁명 (2021년 4월 18일)

내일은 4.19혁명 기념일. 미얀마사태를 보며 1960년 4월 한국을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꿈이자 목표였던 그때... 우리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을까요? 지금 우리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랜만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자서전 를 펼치니, 평생 자신의 '상(喪)'을 치렀다던 프랑스 철학자의 고통이 훅 들어옵니다. 전쟁을 겪고 포로가 되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프랑스 사상계와 정계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 알튀세르가 지금 지속되고 있는 '미래'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요? 그가 겪고 생각했던 무수한 일들을 기록한 자서전에서 하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쓴 부분이 눈에 들어온 건 무슨 연유일까요? 바로 어제 제 수양딸이 맛있고 비싼 커피를 파는 집..

오늘의 문장 2021.04.18

세월호 참사 7주기 (2021년 4월 15일)

내일은 세월호 참사로 적어도 304명이 불귀의 객이 된 지 7년이 되는 날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그 비극적 사건의 여파로 박근혜 정부도 침몰했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제가 문재인 정부에 바란 것은 오직 하나, 구할 수 있었던 세월호의 승객들을 왜 구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내일 오후 4시 16분부터 1분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일대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이렌이 울린다고 합니다. 안산시는 사이렌이 울릴 때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에 동참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는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과 4·16생명안전공원 선포식이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

동행 2021.04.15

순수한 분노 (2021년 4월 13일)

서울시장이 바뀌고 나니 시장의 행보가 매일 인구에 회자되고, 선거에서 패한 더불어민주당과 선거에서 이긴 국민의힘의 내분이 언론을 장식합니다. 그러나 지난 7일의 보궐선거엔 승자가 없습니다. 국민의힘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고 하나 그 '승리'는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라 여당의 실패로 얻은 어부지리에 불과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21년째, 혁명적 시대의 변화 속에서 경험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경륜이 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새 사람들이 20세기적 사고에 길든 사람들을 대체해야 합니다. 경향신문 문화부의 백승찬 차장이 쓴 글을 읽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두 편의 글이 떠오릅니다. 빅토르 위고의 과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 차장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본 후에 신..

동행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