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10

노년일기 132: 전문가 (2022년 8월 29일)

아래층 목욕탕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지 20일...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래층에 사는 분들은 세수하다가 뒷머리에 똑똑 떨어지는 물을 맞았으니 얼마나 불쾌했을까요? 우리 가족들은 삼십 도가 넘는 더위에 목욕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영 불편했습니다. 물 떨어지는 것을 보러 아래층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현관문엔 '0000교회'라 쓰인 작은 명찰 같은 게 붙어 있고 문을 여니 정면에 크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증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왔는데 문제에 대한 걱정이 큰 만큼 초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그 집들 모두 예수님의 초상을 입구에 걸어두진 않을 테니까요. 두 명의 '누수 전문가'가 다녀갔지만 문제를 찾아내지 ..

동행 2022.08.29

노년일기 131: 빚 갚기 (2022년 8월 25일)

젊은 시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얻고 또 돈을 빌려 집을 샀습니다. 그리곤 제법 열심히, 즉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참고 하면서 간신히 은행 빚을 갚았습니다. 다 갚고 보니 저는 젊지 않았습니다. 가끔 거울 속 흰머리를 빗으며 '그래도 빚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갚지 못한 빚이 제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봄이 끝나갈 땐 봄에 받은 사랑 빚을 갚지 못하고 여름을 맞으니 어쩌나 했는데 서늘한 바람이 아침을 가르니 이 한 해 동안 받은 사랑도 또 갚지 못하겠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전에는 '빚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빛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젠 '아무리 해도 이 生에서 진 빚을 갚지 못하고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건 부끄러움뿐입니다. ..

나의 이야기 2022.08.25

텅 빈 캔버스 (2022년 8월 22일)

책의 다양함은 사람의 다양함을 닮았습니다. 심각한 사람, 웃기는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듯 어떤 책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고 어떤 책은 소리 내어 웃게 하고 어떤 책은 먼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네델란드 화가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동생 테오 (Theo van Gogh: 1857-1891)에게 보낸 편지들은 읽을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줄곧 동생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야 했던 형, 그 형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6개월 후 서른셋 젊은 나이에 사망한 동생... 에서 형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옮기며 고흐처럼 '진리를 알고' 있으나 동료 인간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외로이 '나아가는' 천재들을 생각합니다. 우리 보통 인간들은 모두 그들에게 빚..

오늘의 문장 2022.08.22

노년일기 130: 고무줄 (2022년 8월 19일)

몇 년 전만 해도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는 건 몹시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올여름은 반바지 두 벌로 버텼습니다. 다리 절반이 노출되니 시원한데다 뜨거운 직사광선이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말도 들어서입니다. 한 벌은 가족이 입던 것으로 엉덩이 부분이 해어져 꿰매어 입었지만, 헌옷수거함 출신인 다른 한 벌은 출신지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새 것입니다. 삼사 년 묵은 초가지붕 색과 짙은 남색인데, 두 바지 모두 면을 꼬아 만든 띠로 허리둘레를 조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허리밴드가 신축성이 없다 보니 바지를 입고 벗을 때마다 띠를 묶었다 풀었다 해야 해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띠를 빼내고 고무줄을 넣었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아, 또 하나 닮고 싶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고무줄 같은 ..

나의 이야기 2022.08.19

기자를 찾습니다! (2022년 8월 16일)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해 12년 만에 끝낸 기자 생활을 후회한 적은 없었습니다.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를 거치며 훌륭한 인물들, 천박한 위선자들, 매명에 뛰어난 사기꾼들을 만났고, 다양한 향락과 그보다 더 다양한 불행도 보았습니다. 기자 생활을 한 덕에 천국도 지옥도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돈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고 돈과 권력이 이란성 쌍둥이가 되고 기자가 '기레기'가 된 후, 신문이나 방송의 기자가 하루 아침에 정부 요직을 맡아 '언론은 정부를 감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부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늘면서, 기자였던 과거가 부끄러울 때가 많아졌습니다. 기자들이 노트보다 노트북을 선호하게 되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과..

동행 2022.08.16

아! 국립현대미술관 (2022년 8월 13일)

젊은 그림 수집가들이 늘어나며 미술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지만 의미 있는 전시와 볼 만한 전시를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지난 5월엔 연희동 일원에서 열리는 연희아트페어에 갔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작은 갤러리들을 연계해 여는 미술 행사인데 손과 머리의 거리가 아주 먼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눈을 씻어야겠구나... 현대미술관의 세 관 중에서도 덕수궁관을 좋아하니 덕수궁에 가야지... 그러다 어제 신문에서 아래 글을 보았습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에게 감사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8110300055 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국..

동행 2022.08.13

노년일기 129: 요섭의 속눈썹 (2022년 8월 10일)

오른쪽 눈의 속눈썹이 눈꺼풀을 찔러 상처가 났습니다. 나이들며 눈꺼풀이 내려오는데다 더위로 인해 피부가 거의 항상 젖어 있으니 속눈썹처럼 약한 자극에도 상처가 나는 것이겠지요. 쌍꺼풀의 겹진 부분이라 남의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쓰라립니다. 속눈썹 하면 요섭이 떠오릅니다. 경향신문 정치부 정요섭 기자...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던 그와 저는 1980년대 중반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출입기자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기자들이었고, 저는 당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에 있던 외무부 기자실에 출입하던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요섭과 저는 가끔 8층 창가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기자실의 큰 테이블에 앉아 뭔..

나의 이야기 2022.08.10

그림자 경주 (2022년 8월 7일)

한낮 햇볕 속을 걸을 땐 언제나 귀여운 작은 아이가 제 앞에서 저와 함께 걷습니다. 제 몸의 4~5분의 1쯤 되는 제 그림자 ... 때로는 그 속에 숨고 싶습니다. 셸 실버스틴도 자기 그림자를 만났나 봅니다. Shadow Race Every time I've raced my shadow When the sun was at my back, It always ran ahead of me, Always got the best of me. But every time I've raced my shadow When my face was toward the sun, I won. -- Shel Silverstein. 그림자 경주 내가 내 그림자하고 경주할 때 해가 내 등 뒤에 있을 땐 언제나 내 그림자가 앞서 달려 나..

오늘의 문장 2022.08.07

아름다운 책 (2022년 8월 4일)

7월 끝자락, 하필 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날 저희 동네까지 찾아와준 친구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 표지부터 속살까지 온통 하얀데 '전각, 篆刻 세상을 담다'부터 '글 석한남'과 출판사 이름으로 보이는 '廣場'까지 표지의 문자들은 모두 음각하듯 눌러 쓴 글씨이고, 표지 한가운데엔 붉은 색으로 전각된 '유음遊吟'이 눈밭에 앉은 장미꽃처럼 또렷했습니다. 표지 날개 안쪽에 " '유음'은 '정본 여유당전서 定本 與猶堂全書' 19권의 "세상 밖에 놀며 읊조리다 遊吟物外"에서 유래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책을 펼치니 6.25전쟁 전후 부산의 작가들, 화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던 후원자들에 대한 서술이 있고 '인장을 새겨서 제작하는 서예'인 전각 예술에 대한 소개가 이어..

오늘의 문장 2022.08.04

8월 시의 외침! (2022년 8월 1일)

7월 잔인한 마지막 주를 살아남은 살진 몸집에 8월 소금 품은 아침 이슬이 맺히고 흐르며 맥이 풀립니다. 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널브러진 정신이 살아낼 수 있을까, 살아내야 할까, 허둥댑니다. 문득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1893-1967)의 시 '8월 (August)'의 외침이 들립니다. 'Summer, do your worst!' 그래, 여름아, 할 테면 해보아라! 널브러졌던 정신과 육체가 힘겹게 일어섭니다. 도로시 파커가 속삭입니다. '넌 살아낼 거야. 베테랑이잖아!' The Veteran Dorothy Parker When I was young and bold and strong, Oh, right was right, and wrong was wrong!..

오늘의 문장 202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