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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수전 손택의 말 (2021년 11월 29일)

일년 열두 달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11월. 새벽 같고 황혼 같은 11월. 책 덕에 춥지 않은 11월. 열흘 전에 읽은 이 떠오릅니다.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 , 마음산책, 번역 김선형, p. 66 수전 손택: Susan Sontag: 1933-2004

오늘의 문장 2021.11.29

전두환과 이순자 (2021년 11월 25일)

지난 23일 아침 전두환 씨가 사망했다는 문자를 받자 제일 먼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슬프다는 뜻의 '안됐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 용서를 빌 기회를 놓쳐서 '안됐다'는 것입니다. 나이 든 사람의 죽음은 낡은 육신과의 결별이니 대단히 슬플 것이 없습니다. 슬픈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벼워질 기회이지요. 젊은 시절에 저지른 어리석은 짓에 대해 반성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한을 다소나마 풀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 속 어리석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행위입니다. 살아있는 시간이 유의미한 것이 되려면 반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성 능력이 없었던 전두환 씨의 경우엔 살아있을 때도 이미 죽은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동행 2021.11.25

모가디슈 (2021년 11월 21일)

영화는 산업이지만 산업 이상입니다. 잘 만든 영화에 담긴 찰나는 불멸합니다. '모가디슈'는 지난 7월 말 개봉돼 호평을 받았으나 곧 이어 나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인해 응당 누려야 할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너무 일찍 영화 역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남북한의 통일이 실현된다면 '모가디슈'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함께 제일 먼저 소환될 겁니다. '모가디슈'를 보니 남북한이 세계 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세계가 'Korea' 자체를 모르던 1960년 대부터 1980년 대 중반까지, 남북한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경쟁했고, 남북한의 외교관들은 최전선의 군인들처럼 고생했습니다. 실화에 근거한 '모가디슈'를 보면서..

동행 2021.11.21

노년일기 95: 아름다운 지우개 (2021년 11월 18일)

산소는 무색, 무취라지만 산 사람은 유색, 유취입니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게 삶이니 삶에도 빛깔이 있고 냄새가 있습니다. 어떤 냄새는 코를 막게 하고 어떤 냄새는 숨을 들이쉬게 합니다. 어떤 냄새는 따뜻한 손 같고 어떤 냄새는 매질 같습니다. 담 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는 평화를 나릅니다. 제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여러 십년 쌓인 먼지 냄새? 붉고 푸른 감정의 재 냄새?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랑의 냄새? 나무 냄새가 나면 좋겠지만 잡식의 냄새가 나겠지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비만 오면 제 영혼이 제 몸을 끌고 나가는지 비, 아름다운 지우개!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악취를 씻어내는 지우개 같은 사람이 ...

나의 이야기 2021.11.18

이동원 씨를 보내며 (2021년 11월 15일)

애도 이동원 단 하나의 노래 단 하나의 수줍음 세상은 꼭 그가 앉았던 자리만큼 가벼워지고 이윽고 빈 하늘 ... 그러나 ... 빈 것 중에 비어 있는 것이 있는가 ------------------------------------ 어제 새벽 이동원 씨가 별세했다는 얘길 듣자 풍경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1990년 대 어느 날 예술의 전당 무대 바로 앞 자리에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는데 주먹을 쥐다시피 한 두 손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어딘가 먼 곳을 향한 시선은 '세상이 여전히 낯설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동원 (1951-2021). 이별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그가 그립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nB8GY7GOII&ab_chan..

동행 2021.11.15

빵만큼만 다양했으면 (2021년 11월 12일)

이른 아침 산책길에 동네 빵카페에 들렀습니다. 오늘만 그런 걸까요? 띄엄띄엄 앉은 손님은 모두 여자입니다. 세상에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면? 다 자란 사람만 있고 어린이는 없다면? 젊은이만 있고 노인은 없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엔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고 비슷한 것을 즐기려 합니다. 심한 경우엔 다른 생각, 다른 사람을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일도 있습니다. 인구 구성까지 단조로워지면 사람들의 사고가 더더욱 편협해질 겁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진열대의 빵만큼만이라도, 투명 냉장고의 음료만큼이라도 다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본적 예의범절은 누구나 지켜야 하지만 생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다수의 횡포와 획일화, ..

동행 2021.11.12

노년일기 94: 시부모 흉보기 (2021년 11월 10일)

어제 낮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응급실' 카페에 갔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창가 자리엔 두 여인이 담소 중이고, 왼쪽 방엔 손님 하나가 노트북과 씨름 중이었습니다. 저는 두 여인과 멀리 떨어진, 벽에 면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응급실'에 가는 재미 중 하나는 '라디오 스위스'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대개의 동네 카페에서 들을 수 없는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 라흐마니노프나 쇼팽의 음악이 나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저만치 왼쪽으로 난 통창 밖 풍경을 보면 저절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제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창가 자리 두 여인의 대화가 때때로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사람..

동행 2021.11.10

노년일기93: 노인의 웃음 (2021년 11월 7일)

형편이 너무도 팍팍하여 웃을 수 없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운좋은 저는 적당히 가난하여 웃을 수가 있습니다. 저의 웃음은 흰머리와 함께 늘어가는데 대개는 저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입니다. 집안을 오가며 부딪치는 일이 흔하고 그럴 때면 비명을 지르자 마자 웃게 됩니다. '십여 년을 산 이 집이 아직도 낯선가?' 웃음이 나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러 가다가 도중에 다른 일을 발견해 그 일을 하고 애초의 일을 잊는 일도 많습니다. 뭔가 꺼림칙하다는 느낌이 들면 처음 가던 길로 갑니다. 그제야 처음에 하려던 일이 떠오릅니다. '이봐, 정신차리게!' 저를 꾸짖으며 웃습니다. 바닥에 앉아 있다 일어서려면 힘이 듭니다. '아이구'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 소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웃음을 자아냅니다. 파스를 붙..

나의 이야기 2021.11.07

학생의 날 (2021년 11월 3일)

오늘은 '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출발해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광주중학생들이 내렸고, 이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조선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습니다. 조선 남학생들이 항의하며 그들과 일본 학생들이 싸움을 벌였고 그렇게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작년 오늘자 한국일보에 실린 손호철 교수의 글을 요약하면, "한국 학생운동의 기원격인 광주학생운동은 우발적인, 일회성 항일투쟁이 아니었고 5개월간 전국 320개 학교의 5만 4,000여 명이 참여한,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항일 독립투쟁이며 간도·상하이·베이징·일본·미주에까지 번져간 국제적 투쟁"이었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지금 이곳에 이르기까지 피 흘린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얼..

동행 202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