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10

노년일기 92: 검버섯 (2021년 10월 27일)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제 또래 여인을 보았습니다. 화장도 하고 염색도 해서 썩 늙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검버섯이 자꾸 생겨요. 손에도 생기고 팔에도 생기고 얼굴에도 생겨요. 검버섯을 볼 때마다, 아 나도 이젠 늙었구나,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이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큰 걱정이 없는 사람일 테니까요. 저도 검버섯이라면 제법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이와 비슷하게 손등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팔, 얼굴, 콧등에도 생겼습니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에도 꽤 있고, 생기려는 징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검버섯은 아주 작고 옅은, 분홍과 자주 사이의 어떤 빛깔 점으로 태어나 점점 짙어져 다양한 농도의 갈색으로 자리잡습니다. 저..

동행 2021.10.27

노년일기 91: 헌옷을 입는 이유 (2021년 10월 24일)

새 옷을 산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옷을 사지 않는 이유는 첫째, 옷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옷의 수는 나이에 비례합니다. 일 년에 하나만 사도 30년이면 30벌이 되니까요. 둘째는 외출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외출을 별로 하지 않으니 새 옷이 필요없습니다. 셋째는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위의 두 가지에 해당되는 경우에조차 계속 옷을 사는 일이 흔합니다. 돈이 많으면 낭비도 많으니 적당한 가난은 축복입니다. '옷은 나이가 입는다'는 말도 있지만, 예전에 자주 입던 옷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아파트 주민들이 헌 옷을 내놓는 헌 옷 수거함에 넣어야 합..

동행 2021.10.24

사랑 없는 지식 (2021년 10월 21일)

오래 전 애인은 책을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책 읽기처럼 재미있는 일을 즐기지 않는 게 궁금해 어느 날 그에게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반문했습니다. 왜 그리 책을 읽느냐고.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하니 그는 자신은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게 많다며, '책은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이냐 물으니 헤르만 헤세의 라고 했습니다. 불교 신자도 아닌 사람이 라니...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문고판을 빌려주어 저도 그 책을 읽었지만, 왜 그 책 하나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십년쯤 후 다시 그 책을 읽는데 참 좋았습니다. 왜 그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아니, ..

동행 2021.10.21

노년일기 90: 숨바꼭질 (2021년 10월 19일)

이른 아침 산책길 마스크 위 안경에 자꾸 김이 서려 걷다 멈추고 걷다 멈춰야 했습니다. 시야가 흐려지니 걷는 게 영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보도블럭 중엔 잘못 놓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기분이 나빠지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동쪽에 낮게 뜬 해를 보았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요 해는 밝은데 젖어 보였습니다. 슬프지만 명랑한 아이나 노인처럼.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 올려다보니 해가 느릿느릿 나뭇가지 사이로 숨었다 나오고 다시 숨었다가 나왔습니다. 숨바꼭질 덕에 김 서린 안경 뒤의 눈과 마스크 속 입이 웃었습니다. 흰색과 검은 색 사이 모든 빛을 끌어안은 듯한 얼굴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내가 네게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알아?' 오늘도 또 부끄러운 하루의 시작입니다.

나의 이야기 2021.10.19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021년 10월 16일)

시월 한가운데에 들어선 겨울 같은 추위가 옛날을 소환합니다. 책장을 기웃거리다 전혜린 (1934-1965)의 를 집어 듭니다. 전혜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속이 싸해집니다. '이런 완벽한 순간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는 소제목에 이어지는 문장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p. 97, 전혜린, , 삼중당문고 제게도 가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오늘 동네 횡단보도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갑작스런 추위도 하늘의 아름다움을 지우진 못합니다. 아니 추위는, 아름다운 문장 아래 그어진 밑줄처럼 하늘과 녹슬고 있는 나뭇잎들을 강조합니다.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아..

오늘의 문장 2021.10.16

은행나무 똥 (2021년 10월 13일)

하늘이 아름다워 고개를 치켜 올린 채 걷다 보면 은행나무 똥을 밟기 일쑤입니다. 운동화 바닥의 똥을 씻어내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냄새를 옮기게 됩니다. 은행나무 똥을 피하다 보면 픽 웃게 됩니다. 제 뱃속의 똥 생각 때문이지요. 2012년에 출간한 제 한영시집 에 그 생각을 담은 시가 있습니다. 은행나무 똥 하루 평균 1113 그램의 똥을 싸고 2킬로그램에서 10킬로그램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얼굴을 찡그린다 은행이 벗어놓은 옷에서 똥 냄새난다고! Ginkgo Shit Producing an average of 1113 grams of shit, carrying between 2 and 10 kilos at any given time, people make faces under gink..

나의 이야기 2021.10.13

'노인'과 '틀니' (2021년 10월 10일)

작년 5월 서울셀렉션 김형근 대표님 덕에 이라는 제목의 시산문집을 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상황을 넘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각성에 대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 책에 실린 글 중에 '노인'이라는 제목의 한 줄 시가 있습니다. "노인 별 위를 걷는 틀니 낀 아이" 엊그제 어떤 인터넷 카페에 이 시가 잘못 인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댓글로 시정을 요청하려 했으나 카페 회원이 아니면 댓글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포털에 시정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제 시를 잘못 인용한 글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이 시를 옮긴 사람은 왜 이 시의 제목을 '노인'이 아닌 '틀니'로 했을까요? 왜 제가 쓰지 않은 문장들을 제가 썼다고 하고 제가 쓴 문장을 바꾼 걸까요? 카페의..

동행 2021.10.10

화천대유, 천화동인 (2021년 10월 7일)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이 회자되기 시작한 지 한참이지만 공부가 부족한 저는 아직도 이 단어들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이 단어들을 설명한 강수돌 교수의 칼럼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세상읽기 화천대유? 역의 철학과 개발 자본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3000년 전 동양 고전 은 음양의 조합인 64괘를 통해 우주 만물의 근본 이치를 논한다. 점술서요, 철학서다. 천지의 일부인 인간이 ‘역(易)의 철학’을 배워 삶의 지혜를 구하라는 것! ‘역’은 곧 변화다. 천지인은 변한다. 그러니 성공에 자만해도 안 되고, 실패라 포기할 것도 없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지금은 금융자본주의다. 3000년 전 노예제 때의 이 여전..

동행 2021.10.07

경험, 반항. 죽음 (2021년 10월 4일)

작은 노트에서 9월 23일에 적은 일부를 만났는데 이 책의 원제가 무엇인지, 누가 번역했는지는 써놓지 않았으니 답답합니다. 원제가 무엇이든 번역자가 누구이든 원저자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분명하고, 글이 전하려는 메시지 또한 분명하니 아래에 옮겨둡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이 생략되었음을 뜻합니다. 먼저 인용 구절을 쓰고 괄호 안에 제 생각을 적습니다. p. 201 경험을 통해 배울 만큼 나이를 많이 먹은 이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경험을 통해 배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조금이나마 지혜로워진다면 경험에서 배운 것을 숙고하며 실천하는 덕이겠지요.) p. 242 한 사람의 인생을 특징 짓는 것은 천성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반항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

오늘의 문장 2021.10.04

게으름에 대한 찬양 (2021년 10월 1일)

새해나 새달에 들어설 때면 대개 '더 열심히 00해야겠다'는 각오들을 다지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월은 계단을 한 번에 몇 개씩 오르듯 살았지만 시월엔 좀 게을러져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구월 끝자락에 몸살이 나서 며칠 누워 있으려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최소한 나잇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좋아하는 카페에 갔더니 테이블에 쌓인 책 중 한 권이 자꾸 말을 걸었습니다. .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버트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책입니다. 못 마시던 커피를 마시게 된 것만 해도 즐거운데 친구 같은 책을 만나 '게으름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게으름에 관한 구절은 마음에 담고, 작은 노트엔 ..

오늘의 문장 202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