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제대군인의 편지 (2009년 5월 1일)

divicom 2009. 12. 29. 18:47

“‘비상연락망 최신화 협조 안내문.’ 안녕하십니까? OO동 예비군 동대장입니다. 이번에 비상연락망 최신화 작업을 새로하게 되었습니다. 원활한 비상연락망 최신화를 위하여 아래의 전화번호로 본인의 성함과 생년월일 핸드폰 번호를 문자나 전화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실 연락처: 010-xxxx-xxxx, 010-xxxx-xxxx, 010-xxxx-xxxx”

며칠 전 현관에 붙어 있던 종이쪽지입니다.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쪽지이지만 기분을 망치기엔 충분했습니다. 지난 2월 “귀하는 금년도에 본인이 지휘하는 중대에 동원지정 되었음을 알려드리며, 중대원의 일원으로 편성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전환기적인 안보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당 부대에 지정되어 있는 예비군 여러분들은 올해 6월 중에 계획되어 있는 동원훈련에 반드시 참석하시어 전환기적 안보상황에 국가방위의 주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방패로서, 가정의 기둥으로서 최선을 다하시길 바라며” 운운 하는 모 대위 명의의 ‘동원예비군용 군사우편’을 받았을 때처럼 말입니다.

비상연락망을 “최신화”하려면 이미 등록되어 있는 제대군인들의 집 전화, 핸드폰, 이메일 등을 통해 예비군 당국이 알고 있는 정보가 맞는지 물어보면 될 텐데 그 작업을 하는 대신 “협조 안내문”이란 걸 보내어 제대군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라고 합니다. 형식은 ‘협조’를 구하는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명령’하는 겁니다. 힘 있는 부모를 만나 군 복무를 피한 또래들은 생전 받지 않을 이런 식의 명령을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전역 후에도 8년 동안이나 받아야 합니다. 6년 동안은 훈련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1968년 4월 만들어진 ‘향토예비군가’가 41년 만에 신세대 예비군의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되어 이달부터 사용된다고 하지만, 경쾌한 랩이 추가되거나 유명한 가수가 군가를 부른다고 해서 훈련이 즐거워지는 건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 훈련을 받지 못하면 나중에 보충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 훈련도 받지 못하면 1년 이하의 징역, 2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 처분을 받습니다.

제 친구 하나는 회사 일로 출장을 가느라 훈련을 빼먹어 50만 원의 벌금을 물었습니다. 미리 불참 사유를 알렸어야 하는데 깜빡 잊은 것입니다. 100만 원 조금 넘는 월급으로 간신히 생활하는 친구에게 그 벌금은 이만저만한 타격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그 친구가 ‘동원예비군용 군사우편’의 “국가방위의 주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방패로서” 하는 표현을 보고 냉소하는 건 당연합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다 그런지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군대에서 보낸 시간은 잊을 수 없는 꿈처럼 자꾸 떠오릅니다. 돼지인플루엔자에 대한 오해 때문에 돼지고기를 사먹지 않는다고 하니 안 팔리는 돼지고기는 모두 군대로 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류독감이 유행하여 닭고기 판매가 얼어붙었을 때 군인들은 매일 닭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미국산 쇠고기도 유통기한 끝나기 전에 군대로 갈 거라고 하니, 이러다간 군인들의 식판이 고기로 채워질지도 모릅니다. 어디선가 읽은 현역군인의 볼멘소리가 생각납니다. “군인이 무슨 마루타입니까?”

엊그제 신문에서 “모든 병사들, 2013년부터 침대서 잔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눅눅하고 단단하던, 얇디얇은 매트리스가 떠오르며 허리가 뻐근해졌습니다. 병사들이 침대에서 자게 된다는 기사에 뒤이어 나온 칼럼 중에는 “집에서 침대생활을 하던 병사들이 이제야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우리나라엔 아직 전통적 방식의 요와 이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들만큼 사는 줄 알고 “요즘 대학 못 가는 사람 있나?” “해외여행 안 해 본 사람 있나?”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제가 있던 부대에선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왔다는 사실만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돼지백정 노릇을 한 병사나 입대할 때 처음 기차를 타본 사병의 눈에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특권층으로 보인 건 당연합니다.

국방부가 창군 이후 처음으로 확정했다는 ‘군인복지 기본계획’에 따라 간부들의 관사와 독신자숙소가 대폭 개선되고, 장기복무 군인들의 주택보유율이 50%까지 높아지며, 군 관련 취업직위 개발로 10년 이상 복무 후 전역한 군인들의 재취업률이 70%선으로 높아질 거라는 기사를 보니 제가 만났던 하사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버트 랭커스터만큼 멋졌던 박 중사는 불필요하게 장병들을 괴롭히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장병들이 군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늘 마음을 썼습니다. 어느 날인가 출퇴근길에 구해두었던 재활용 목재와 조명기구로 사병들의 노래방을 만들어준 일이 생각납니다. 그런가하면 부대에 들어오는 고기 중 제일 좋은 부위만 골라 퇴근 차에 싣고 나가던 하사관도 있고, 휴가나 외박을 나가는 사병들에게 꼭 자기 부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오라고 한 하사도 있습니다.

7월부터는 군인들이 1,386원을 ‘보급품 구입비’로 받아 세숫비누, 세탁비누, 면도날, 치약, 칫솔, 구두약 등을 각자 구입해서 쓴다고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보급 받은 비누와 치약 등은 품질이 너무 낮아 늘 ‘사제’ 물품을 쓰고 싶었지만 내무반의 동료들 모두 같은 걸 쓴다는 사실에 기대어 견딜 수 있었습니다. 국방부 자체조사로도 6가지 생필품을 사려면 월평균 4,010원이 든다니 어차피 ‘보급품 구입비’로 보급품을 사 쓸 수는 없을 겁니다. 부모를 잘 둔 사병들은 유명브랜드 제품을 사 쓰고 그렇지 않은 사병들은 형편없는 걸 사 쓰든지 옆의 사람 것을 훔치거나 빌려 쓰게 되겠지요.

현역으로 가는가, 공익이나 특례로 빠지는가가 청년들을 분열시킨다면 어떤 물건을 사 쓰는가가 군인들을 분열시킬 겁니다. 2008년 1월 병사의 월급이 10퍼센트 인상되어 이병의 초봉이 7만3,500원, 일병은 7만9,500원, 상병은 8만8,000원, 병장은 9만7,500원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월급을 통째로 집으로 보내어 생활비에 보태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월급을 다 제 맘대로 쓸 수 있는 병사도 있을 거고, 월급만으로는 부족해 부모에게서 타내는 병사도 있을 겁니다.

한때는 군복이나 교복 등 유니폼 덕에 사회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평등이 군대나 학교에선 일부나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젠 학교에도 군대에도 평등은 없습니다. 부모를 아주 잘 만난 젊은이들은 군대를 가지 않거나 무늬로만 갑니다. 지난해 2월이었나요?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한 후보의 아들 상준 씨가 병역특례로 방위산업체인 LG CNS에서 근무하는 4년 6개월 동안 14차례, 244일 동안 해외에 체류했으며, 2003년 2월과 2005년 4월에 출장과 휴가를 떠나며 골프채 1세트를 반출 신고했다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문제일 뿐 한 후보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한 총리 자신의 군경력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이력을 보니 한 총리는 1958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때 육군장교 (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상황장교)로 임관했으며, 1960년 3월에 정치외교학 학사로 연세대를 졸업했고, 1962년 10월엔 육군장교로 전역했다고 합니다. 임관 후부터 전역할 때까지 4차례에 걸쳐 11개월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니 사실이라면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만만치 않지만 군대에서의 나날은 더욱 어렵습니다. 단체 생활도 힘들고 훈련도 버거운 데다 한참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에 2년이나 되는 시간을 덜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청년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하고 부모들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기 싫어하는 게 당연할지 모릅니다. 군인들의 자살과 범죄는 그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군에서 자살한 사람은 2002년 79명에서 조금씩 줄어 2005년 64명까지 감소했다가 다시 증가하여 2007년엔 80명, 작년엔 75명이었다고 합니다. 2008년 한 해 동안 각종 법률 위반으로 입건된 군인이 7,347명, 그 중 군무이탈이 1,009명이나 되었다는 게 국방부의 얘기입니다. 군무이탈, 교통범죄, 폭력범죄가 전체 범죄의 61퍼센트를 차지했고 성범죄로 입건된 군인도 28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군대에 ‘무척’ 가고 싶었으나 기관지 확장증으로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가지 못한 이명박 대통령은 군대에 미련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작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군복이 자랑스럽고 군인의 길이 영광스럽도록” 하겠다고 언명하시더니, 지난 2월 28일 학군사관학교(ROTC) 임관식에선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겠다”고 하셨고, 올 초엔 청와대 지하벙커에 ‘워룸 (War Room)’이라 불리는 비상경제상황실을 설치하셨습니다.

그러나 청와대에 ‘워룸’을 설치하거나, 군인 여럿이 누워 자는 침상을 개인 침대로 바꾼다고 해서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되진 않을 겁니다.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게 자랑스러우려면 군인이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 사회적 인정과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한 사람, 하는 사람이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군인에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들 중 제일 좋은 걸 제공해야 합니다. 쌀이든 고기든 비누든 침대든.

군대에 간 젊은이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막사에서 오래 묵은 쌀과 의심스러운 고기를 먹으며 싸구려 일꾼 취급을 받고, 힘 있는 부모를 둔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분을 느끼는 한,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게 자랑스러운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대군인이 공무원채용시험 등에 응시한 때에 부여하던 3~5퍼센트의 가산점조차 위헌이라고 폐지하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내세우되 아무런 사회적 보답도 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군복은 힘없는 젊은이들을 부당하게 가두는 수의(囚衣)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군대에서의 2년 동안 저는 사회에 나가 만나게 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에서 맞닥뜨리게 될 무수한 부당함을 미리 맛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군대에 가는 사람들은 저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게 되길,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게 자랑스러운 날”이 오기를 누구보다 바랍니다.

요 며칠 한낮은 이미 덥습니다. 언제나 ‘사회’보다 더 덥고 더 추운 군대, 그곳에 청춘을 저당 잡힌 젊은이들을 위로, 격려할 방법은 없을까요? 돼지인플루엔자 때문에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는 돼지고기를 매일 식판에 올리어 심리적 더위까지 추가하는 대신, 이제 막 나왔지만 익을 만큼 익은 수박을 공급하여 상큼하게 5월을 시작하게 하면 어떨까요? 제 희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제대군인의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일러두기: 제 주변엔 젊고 늙은 제대군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제대군인이 쓴 편지 형식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