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신문의 죽음 (2009년 4월 3일)

divicom 2009. 12. 29. 18:37

4월 7일은 53번째 신문의 날입니다. 1970년 대 말 신문의 날은 휴일 없이 살던 신문기자들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었습니다. 늘 마감에 쫓겨 사느라 가보지 못했던 ‘피카소 도예전’을 보러 덕수궁에 갔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먼발치에서 보고 쑥스러워 피하던 게 생각납니다. 월급은 적었고 밤낮 특종을 찾아 헤매느라 기자들의 수명 또한 다른 직종에 비해 짧았지만, 신문은 아직 신뢰와 사랑을 받는 매체였습니다.

그로부터 30년, 지구촌 곳곳에서 신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을 닫거나 종이신문 발행을 중지하는 신문사들이 늘어납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아온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다시 조기퇴직을 실시한다 하고, 뉴욕 타임스도 직원들을 감원하고 임금을 삭감할 거라 합니다. 지난 3월 27일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가 종이신문 발행을 중지했습니다. 마지막 신문에 실린 존 옘마 편집국장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변화를 긍정하는 단어로 가득하지만 읽다보면 가슴이 짜안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간지를 발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도전과 진보를 기록해온 100년 전통의 언론기업으로서 모니터는 그 어느 때보다 일간적(日刊的)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주간지의 발행과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온라인으로 우리와 만나는 독자는 한 달에 2백만 명, 종이신문 구독자의 40배나 됩니다. 종이신문을 읽지 않던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우리 신문을 읽고 오디오캐스트를 듣고 사진과 비디오 기사를 봅니다... 주간지는 인터넷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며 아이디어와 이슈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줄 겁니다.

또한 중요한 뉴스를 정리하여 매일 이메일로 보내 드리는 뉴스브리핑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바로 (여기를 클릭하여) 주간지를 구독할 수 있고 뉴스브리핑도 곧 구독할 수 있게 됩니다. 인터넷판은 무료입니다. 인터넷, 주간지, 이메일, 이 세 가지가 1908년 메어리 베이커 에디가 창간한 국제적 일간지의 오늘을 구성합니다...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새 옷을 입지만 1세기 전부터 고수해온 목표 --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모든 이에게 행복을 준다’ --를 위해 헌신하는 같은 신문입니다...”

미국 메릴랜드 주 출신의 상원의원 벤저민 카딘은 3월 24일, 신문사가 원하면 공영방송과 유사한, 교육적 목적을 추구하는 비영리기관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해주는 ‘신문회생법안 (Newspaper Revitalization Act)’을 발의했습니다. 지역 신문들을 위한 이 법안은 신문사의 광고비와 구독료 수입에 대해 세금을 면제 또는 감면 받을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카딘 의원은 판매와 광고에 의존해온 신문 산업의 붕괴가 지역사회와 민주주의에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수한 뉴스 제공자가 있지만 중요한 사안들, 사건의 기록, 일탈행위의 폭로 등에 관한 심도 있는 보도를 원할 때 우리는 신문에 의존합니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뉴스 제공자들은 각 지역사회를 잘 알고 매일 뉴스를 취재해온 신문기자들로부터 정보를 얻습니다. 그러니 신문이 살아남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익에 부합하는 올바른 조처입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자랑해온 프랑스조차 신문 독자의 감소로 인한 정보 획일화를 걱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독자가 2007년보다 8.8 퍼센트 감소하고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독자도 2.4% 감소한데 비해 재벌회사들이 발행하는 무가지들이 급격하게 팽창하여 독자를 장악했다는 게 PD저널의 보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신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 언론재단이 지난여름에 발표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를 보면 2004년 48.3퍼센트였던 신문구독률은 2006년 40퍼센트, 2008년에는 34.6로 하락했습니다. 경기부진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모든 신문이 발행면수를 축소했고, 그 중에서도 전체 신문 정기구독자의 58.1 퍼센트를 차지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세 신문이 가장 크게 줄였습니다. 신문의 위기를 인터넷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인터넷뉴스 이용자는 비이용자에 비해 지상파 텔레비전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은 덜 보지만 신문은 더 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인터넷 뉴스는 신문과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신문이 위기에 처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 위기는 갑작스럽게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위기는 신문이 권력을 견제하는 제4부의 역할을 잊고 스스로 권력이 되면서 시작되었고,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대비의 부재를 틈타 심화되었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신문의 장래를 고민해야 할 신문사 대표들이 힘없는 탤런트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에 가담한 장자연씨 사건은 신문이 맞고 있는 위기의 여러 뿌리 중 적어도 한 가지를 은유합니다.

신문은 분명 위기에 처했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고 그 실마리는 옘마 편집국장과 카딘 상원의원의 말, 그리고 언론수용자 의식조사 속에서 발견됩니다. 신문(新聞)의 존재의의는 그 이름에서 보듯 ‘듣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7일,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선별하여 보도할 때는 기자의 이익이나 기자가 속한 신문사의 이익을 떠나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래전 자신을 지탱했던 허영심, ‘사회의 목탁’이라는 허영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당연히 신문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회사와 달라야 하고 기자는 안정적인 샐러리맨의 삶이나 정치훈련생 노릇을 포기해야 합니다.

신문은 또한 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터넷과 방송이 시시각각 토해내는 소음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시끄럽습니다. 신문이 할 일은 소음과 열변에 지친 독자들에게 정적과 초연(超然)의 순간을 제공하여, 소음이 감추고 있는 진실과 소음에 함몰된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문은 사람을 원래의 크기로 돌려놓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온갖 컴퓨터기기의 발달로 갈수록 미시적이 되는 사람들, 매 순간 인터넷에 나타나는 15자 내외의 제목에 정신을 파는 독자들이 원래의 품격을 회복해낼 수 있게 도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다와 파도를 구별하는 거시적 안목으로 품위 있는 모국어를 구사하며 사건과 사안의 본질을 규명해야 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찾아오지만 죽음에도 품격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생존을 구걸하다 사라질 것인지 역사의 기록자로서 자존심을 회복한 후 장렬히 산화할 것인지, 선택은 신문과 기자에게 있습니다. 게다가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명제가 아직 유효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애쓰면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신문의 부활을 기뻐하는 칼럼을 쓰고 싶습니다. 다시 유일한 휴일이 되어버린 신문의 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모든 이에게 행복을” 주느라 지친 기자들이 고궁의 뜨락을 서성일 때 향기로운 술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