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미국 경찰, 한국 경찰 (2009년 4월 15일)

divicom 2009. 12. 29. 18:42

평생 살고 있는 한국과 잠깐 잠깐 가본 외국에서 만난 경관들은 대개 친절했습니다. 오래 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자정 넘어 길을 떠돌다 파출소에 끌려갔을 때나, 보슬비 오는 저녁 미국에서 교통신호 위반으로 단속을 받았을 때나, 경찰과 얘기한 후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던 건 상식이 통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면 제 생각 속 경찰과 다른 경찰이 많은 것 같습니다.

토요일 밤 로스앤젤레스에서 날아온 연합뉴스엔 한 살배기 딸을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하던 여성이 경찰의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 산타아나 시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오렌지카운티 어바인에 거주하던 37세의 한국계 미국시민권자 수지 영 김은 현지시각 금요일 밤 교통법규를 위반해 경찰로부터 정지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30여 분 간의 추격전 도중 경찰차량을 들이받기도 했던 김 씨가 음주상태였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지 영 김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의 한국계 미국인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현지시각 일요일 오전,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 인근 폴섬 시에서 조셉 한(24)씨가 자기 집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총에 맞았다는 겁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따르면, 한 씨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사흘 정도 식사를 하지 않아 가족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고 911에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신고를 받고 세 명의 경관이 출동하자 한 씨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고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소형 칼을 들고 반항하는 한 씨에게 전기총을 발사한 후 수갑을 채웠으며 충격에서 깨어난 한 씨가 다시 반항하자 경찰이 곧바로 총 한 발을 쏘고 몇 초 후 두 발을 더 발사했다고 합니다.

새크라멘토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새크라멘토 비(Sacremento Bee)는 일요일 인터넷판에 한 씨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칼을 들고 위협적으로 접근하기에 칼을 내려놓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아 전기총을 쏘았고, 잠시 침실로 피했다가 다시 달려들기에 전기총을 또 쏘았으나 효과가 없어 두 명의 경관이 총을 발사했다’는 요지의 경찰 측 얘기를 실었습니다. 어제 나온 속보엔 한 씨의 이름과 함께 경찰 내사과와 검찰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는 얘기가 실려 있지만, 첫 번째 기사와 속보 어디에도 한 씨가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을 맞았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수지 영 김과 조셉 한의 사망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김 씨의 운전이 거칠어 남에게 피해를 줄까봐 걱정이 되었다면 위협사격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몸집도 작다는 한 씨가 소지했던 무기가 총 아닌 칼이었고 수갑까지 차고 있었는데 그에게 총을 쏘아야만 했을까요? 각 지역 한인회들이 경찰의 과잉방어를 문제 삼을 거라고 하니 지켜보아야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우리 경찰은 과속 운전자나 수갑 찬 사람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비상식적인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지난 일요일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는 경찰관들이 유치장 문을 열어 놓아 두 명의 피의자가 도주했습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금요일에 청와대 부근에서 등록금 인하와 청년실업 해결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식을 한 남녀 대학생 49명을 강제 연행했습니다. 학생들의 집회가 당초 신고했던 인원을 초과했고 펼침막을 소지했으며, 구호를 제창하는 등 ‘불법 집회’로 변질돼 연행했다는 게 경찰의 주장이지만, ‘반값 대학등록금’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정부가 공약을 지키지 못한 걸 미안해하는 대신 할 말을 한 대학생들을 연행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괜히 학생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여 5월 1일과 2일로 예정된 집회의 규모를 더 키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탤런트 장자연 씨 사건에 대한 경찰의 태도입니다. 장 씨가 분당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게 3월 7일이니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경찰은 아직 수사 중일 뿐입니다. KBS(한국방송) 텔레비전이 9시 뉴스에서 장 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 전 매니저 유모 씨에게 보낸 자필 문건을 입수했다며, 장 씨가 술 접대와 잠자리 접대까지 강요받았다는 내용을 공개한 게 13일, 경찰은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 수사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수사에 문외한인 제 생각에도 경찰이 우선적으로 신병을 확보해야할 사람은 장 씨의 소속사 대표인 김모 씨였지만 경찰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에 있다는 김 씨는 3월 17일 MBC(문화방송)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부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못 들어갈 이유도 거리낄 일도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그 다음날에야 인터폴에 수배를 의뢰했고 30일에야 외교통상부에 여권무효화 신청을 했으며, 지난 3일에야 범죄인 인도 청구 절차에 들어갔다는 게 한겨레신문의 보도입니다.

그간 인터넷엔 장 씨의 술시중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명단이 ‘장자연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떠돌았고, 조선일보사는 그 리스트에 자사의 고위 임원이 올라 있다고 밝혔다는 이유로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또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대표 신상철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이종걸 의원은 11일 성명을 내어 “평소에는 국민의 알권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며 실명거론에 개의치 않았던 언론사가 이제는 자사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운운하며 국민의 알권리를 은폐하는 행태”를 비난하며, 국회의원에게는 면책특권이라는 헌법상 권한이 있어 권력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자유롭게 폭로,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정희 의원은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조선일보의 고소는 침묵의 카르텔을 깬 국회의원과 언론을 본보기 삼아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거라며, “이렇게 모두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살아있는 권력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장자연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속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뇌물 수수 혐의를 수사하는 검찰의 속도와 너무도 대비가 됩니다. 경찰은 형사소송법에 나와 있는 수사권을 둘러싸고 검찰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작년 말엔 국회에 제출한 ‘2009년도 성과계획서 수정안’에서 검찰의 수사권 독점이 “인권보호와 수사 효율성의 역행”을 초래하고 있다며, 올해 형사소송법 개정 등을 통해 경찰의 ‘수사 주체성’을 명문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어쩌면 장자연 사건은 경찰이 스스로 주장하듯 ‘수사 주체성’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보아도 장 씨의 자살은 타살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자살’입니다.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 있는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힘으로 부도덕을 지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경찰이 하루 빨리 그것을 깨닫고 ‘수사 주체성’을 발휘해주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경찰은 이틀 사이에 두 사람의 한국계 미국인을 억울한 죽음에 빠뜨렸지만 우리 경찰은 억울하게 죽은 젊은이의 한을 풀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