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도하 각 신문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사회장 공고”가 실렸습니다. “故 김준성 前부총리 이수그룹 명예회장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김수한” 이름으로 실린 광고에는 장의위원회 부위원장 여섯 분, 고문 열 분, 장의위원 마흔 세 분과 가족의 명단이 있었습니다. 사회장 공고와 별도로 실린 기사들을 보면 고인은 부총리, 사업가, 은행가, 소설가로 “폭넓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명인들은 고인의 활약상을 지켜본 증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사를 읽다 보면 고인은 참 복도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로선 흔치 않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사업가로 은행가로 성공했습니다. 관운까지 있어 부총리를 역임한데다 노년이 이슥하도록 문청文靑으로 살았고 자식 농사도 잘 지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4,50대는 말할 것도 없고 2,30대들도 직장 없이 기죽어 지내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 여든 일곱 최근까지 전국 경제인 연합회 고문으로 이수그룹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언하고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회장을 한다지? 사회장이 뭔데?” 같이 신문을 보던 친구가 묻습니다. 글쎄, 사회장이 뭐더라, 대충 짐작은 가지만 남에게 설명하기엔 자신이 없습니다. 기사마다 “장례는 사회장”이라고 쓰면서도 사회장이 무언지에 대해선 말이 없습니다. 요즘 신문들은 사적私的인 일엔 시시콜콜 친절하지만 공적인 궁금증에 대해선 함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회장은 “사회에 이바지한 공적이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각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치르는 장례”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회장의 역대 주인공들을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1927년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였던 이상재 선생을 기리는 사회장이 최초로 치러졌고 1930년엔 교육가이며 항일 무장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김좌진 장군의 사회장이 있었습니다. 해방 후 최초의 사회장은 1947년에 거행된 여운형 선생의 “인민장” 이었다고 합니다. 해방 전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에 헌신하다 암살당한 여 선생의 “인민장”은 표현만 다른 사회장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사회장은 인권운동가이며 평화운동가인 이우정 선생을 애도하기 위해 2002년에 치러졌습니다. 그 밖에도 기업가이며 독립운동가이고 교육가였던 이승훈 선생, 시조시인 이은상 선생 등도 사회장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쯤 되자 사회장이 뭐냐고 물었던 입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김준성씨는 왜 사회장을 한대요?” 글쎄, 왜일까요? 국내 첫 지방은행을 세워 초대 행장을 지내고 여러 은행 총재와 국내 굴지의 기업 회장을 역임하며 적자 기업을 흑자로 전환시켰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5공화국 시절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아 고물가를 잡는 공을 세워서일까요?
고인의 성취를 얘기하자 그렇게 번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 반문하며 기업하여 번 돈을 독립운동과 교육기관 설립, 나아가 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데 쓴 이승훈 선생을 상기시킵니다.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사이 이어지는 한마디, “시신을 기증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공고에 “장지: 충북 음성군 대지공원”이라 쓰여 있고 어느 기사에도 기증 얘기는 없는 걸 보니 시신이나 장기를 기증하진 않은 듯 합니다.
그 친구 말고도 김준성씨의 사회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들의 내심에 그분이 누린 복락에 대한 질투, 그만큼 성취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오가 깔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창백한 죽음, 가난한 사람의 오두막이나 왕의 궁전이나 공평하게 찾아간다”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늘 결핍과 이루지 못한 열망에 시달리는 서민들보다 성취 많은 부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빈부도 공과功過도 가리지 않는 죽음, 참으로 공평합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보았던 “바디 팜”이 생각납니다. 바디 팜 (Body Farm)은 말 그대로 “시체 농장”입니다. 미국 테네시 대학교의 인류학자 윌리엄 베이스 박사에 의해 1971년에 시작된 바디 팜, 그 3 에이커 (12,140 평방 미터) 에 달하는 농장 아닌 농장에서 시신들은 다양한 부패와 해체의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시신, 얕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시신, 자동차의 트렁크에 실려 있는 시신…. 모두 법의학적 연구를 위한 의도적 배치입니다.
처음엔 무연고 시체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이젠 기증 시신의 수가 3백을 넘었다고 합니다. 시신을 바디 팜에 기증하는 사람들 덕택에 미국의 법의학은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시신의 부패 정도와 방식을 보고 역추적하여 사망 날짜와 원인을 알아내고 범인을 찾아내는 건 이제 영화 속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본 다큐멘터리 속 70대 남자는 바디 팜의 거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스포츠를 즐기던 생전의 멋진 모습과 한낮의 태양과 밤이슬 아래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공평함, 나아가서 자연의 공평함을 생각했습니다.
사회장을 거행하기로 한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김준성씨를 위한 사회장이 얼마나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가지 의미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잊혀졌던 “사회장”을 신문 지면에 불러내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사회에 기여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이지요. 남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신 우리 또한 미래의 시신임을 기억하며 후회하지 않을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바디 팜에 시신을 기증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결핵, 에이즈, 간염, 항생물질에 내성이 있는 세균성 감염에 걸리시면 안됩니다. 참, 그곳으로부터 200 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사망하면 거기까지 가는 여행 경비도 기증자나 유족이 부담해야 한다는데… 괜찮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