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의사, 의사, 의사 (2007년 8월 2일)

divicom 2009. 11. 17. 00:16

어머니가 급성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 노래교실 친구분들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일산에서 하는 노래교실이 재미있다고 먼 길을 다니시더니 힘에 부치셨던가 봅니다. 12년 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후론 그 병원을 출입하던 분이지만 그곳 직원들이 파업 중인데다 어머니의 증세가 위급하여 서울행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혈액 검사와 CT 촬영을 하고 장이 꼬였으니 서둘러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원엔 응급실 담당 의사뿐인 시각이었지만 어머니가 가신 병원엔 마침 외과 전문의가 수술 중이었습니다. “Winton”이라는 환자의 수술이 끝나자마자 어머니의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여름인데도 한밤중 수술실 앞은 퍽 추웠습니다. 너른 홀은 텅 비어 벽을 따라 놓인 녹색 의자엔 우리 가족뿐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를 나누었지만 일흔 여덟, 어머니의 적잖은 연세가 모두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습니다. 어머니 걱정을 하다 보니 한밤중에 생판 남을 위해 애쓰는 의료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Winton씨 수술에 연이어 어머니 수술을 하니 정신적 긴장과 육체적 피로가 얼마나 심할까, 고맙고도 미안했습니다. 수술은 아직 진행 중이었지만 우리는 요즘 같은 세태에 외과를 택한 집도의를 칭송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친 사람에게 빨간 약을 발라주길 좋아하던 저는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부터 의사에 대해 더욱 깊은 경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라비크 같은 외과의사가 되겠다고 의과 대학 시험을 쳤다 떨어졌고 라비크가 마시던 “칼바도스”를 열심히 구해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제게 의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이나 귀여운 허영심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의대를 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부터 입니다. 의료사고와 응급환자가 드문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전문의를 지원하는 의학도는 많아지고 내과와 외과 계통엔 지원자가 아예 없거나 드물어 몇 년 후엔 그 분야 전문의를 수입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편에선 “얼짱” 풍조에 편승해 돈을 잘 버는 성형외과 의사가 최고의 배우자 감이 라고 하고, 의대를 마친 젊은이가 “물 좋은” 보건소에 공중보건의로 배치되면 1년에 1억이나 되는 리베이트를 받아 챙길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지상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는 나쁜 의사 얘기에다 직접 간접으로 겪은 일들까지 겹쳐 의사가 자꾸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미운 건 길수 형님의 인생을 망친 의사입니다. 이른 아침 쓰러져 돌아가신 형님의 사인死因은 뇌출혈이었지만 저는 형님이 회갑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건 25년 전 만났던 의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간 형님이 한창 진통 중일 때 의사가 형님의 남편에게 아이를 더 낳을 거냐고 물었답니다. 이번이 둘째이니 그만 낳을 거라고 하자 그러면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골치 아픈 일이 없도록 자궁을 들어내자고 하더랍니다. 무식한 남편은 전문가인 의사가 오죽 잘 알겠나 싶어 형님에겐 의논도 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답니다. 형님이 그렇게 해서 20대 중반에 “빈궁 마마”가 되었다는 얘기를 그분의 장례식에서야 들었습니다. 형님이 왜 그리 일찍부터 갱년기 증세로 고생했는지, 왜 언제나 경멸과 분노로 남편을 대했는지, 그 남편이 왜 형님의 홀대를 감수했는지, 모든 게 금세 이해되었습니다.

두어 해 전엔 아흔 고개를 막 넘어선 시어머님이 백내장 수술을 하시겠다고 하여 가족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눈은 밝고 혈압은 높으신 분이 한 겨울에 웬일일까 하고 알아 보니 동네 의원에서 노인들에게 무료 백내장 수술을 해준다는 거였습니다. 서운해 하시는 어머님을 만류하고 한 달쯤 지난 후 그런 식의 무료 진료를 빙자해 과다한 요양급여를 타낸 의사들이 적발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무리 의사 말이라도 믿을 걸 믿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착하고 순박한 이들은 누구나 전문가를 신뢰합니다. 의사, 변호사, 은행원, 교수… 세상에 자신을 믿는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전문가에게 속는 보통 사람의 어리석음보다는 자신을 믿는 보통 사람을 속이는 전문가의 죄가 훨씬 클 것입니다.

새벽 2시,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고 초록색 수술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왔습니다. 그이의 형형한 눈빛이 어두운 수술실 앞을 일순에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장이 심하게 꼬였으나 터지지 않아 다행이다, 괴사한 30 센티미터의 장과 맹장을 잘라 냈으니 이제 괜찮으실 거다, 2~3분 설명에 모두 안도했습니다.

12년 전 외과의사 덕에 위암을 이겨내신 어머니는 또 다시 외과의사 덕에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이젠 누가 뭐라 해도 의사들을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는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사람을 살리느라 애쓰는 의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동안은 말입니다.

복통이 발발했을 때 지체 없이 어머니를 병원으로 싣고 가신 어머니의 노래 교실 친구들, 때맞춰 수술을 받아 우리 어머니까지 제때 수술을 받게 해준, 국적도 얼굴도 모르는 Winton씨, 밤을 새워 가며 환자들을 살리느라 애써준 일산 “ㅂ” 병원 외과팀, 그리고 자신의 복통으로 평소 간과하고 있던 이웃들, 특히 의사의 고마움을 상기시켜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파업 중인 세브란스 근처에서 발병하지 않은 걸 감사 드립니다. 7월 10일 파업이 시작된 이래 연세의료원이 운영하는 여러 곳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백 명의 환자들이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니 하마터면 어머니를 아주 떠나 보낼 뻔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의료원 노동조합 조 민근 위원장은 7월 31일 조합 홈페이지에 올린 “자랑스러운 동지들께” 에서 “우리가 하나되어 저들의 불의에 끝까지 대항하고 싸울 때 왜곡되어진 연세의료원의 역사는 바로 잡힐” 거라며 “승리하는 그날까지 피끓는 동지애로 뭉칩시다” 고 썼습니다. 하지만 중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겐 불의와 싸우는 것조차 사치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언제든 싸울 수 있지만 지금 수술을 받지 못하면 목숨 자체를 잃게 될 수많은 환자들을 생각하여 이제 그만 싸움을 거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우리 어머니처럼 운이 좋을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