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ㅎ일보' 보세요 (2007년 7월 19일)

divicom 2009. 11. 17. 00:14

한 달에 12,000원을 쓰는 일 중에 신문을 구독하는 것만큼 사회적 함의含意가 큰 일도 없을 겁니다. “ㅎ 신문”을 본다고 하면 진보 성향인가보다 하고 “ㅈ 일보”를 본다고 하면 보수적인 사람인가보다 짐작합니다. 제 주변엔 “균형적 시각”을 갖기 위해 “ㅎ 신문”과 “ㅈ 일보,” 두 가지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운동권으로 활동했던 막내 아우가 최근 “ㅈ 일보” 구독을 시작하여 집안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아버지를 비롯, 1980년 이후로 우리 집안엔 “ㅈ 일보”를 구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신문이 5공화국 정권 덕을 보아 유력지가 되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ㅈ 일보”의 노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을 걸어온 아우가 첫 번째 구독자가 되었으니 파문이 일어날 만도 합니다.

아우는 사무실에서 “ㅎ 신문”을 보기 때문에 균형을 위해 집에서 “ㅈ 일보”를 보기로 했다는데 “ㅈ 일보” 구독자에게 주는 특혜와 선물이 힘든 결정을 다소나마 도운 것 같았습니다. 7개월 무료 구독에다 경제 신문 무료 제공, 곁들여 3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까지 받았다면서, 기사의 수가 “ㅎ 신문”에 비해 훨씬 많아 신문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자랑인지 변명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문득 예전에 “ㅈ 일보” 구독을 권유 받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중년 남자가 명령조로 말했습니다. “ㅈ 일보 보세요. 일년 동안 그냥 넣어드릴 게요.” 일년이나 무료인데 안 보고 배길래? 하는 식이었습니다. “아니요, 이미 보고 있는 신문이 있어요.” 그 사람은 문을 닫지 못하게 꽉 붙들고 눈에 힘을 주었습니다. “아니, 이 계단 쓰는 집들 다 보는데 왜 이 집만 안 봐요?” 얼마나 무식하기에 이 신문을 안 보는 거냐 하는 말투가 험악한 표정에 잘 어울렸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 신문은 너무 어려워서 못 봐요.” 하고 웃어주었겠지만 그때는 독이 올라 “글쎄, 안 본다니까요!” 하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얼마나 불쾌했던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신문은 보지 않겠노라 맹세를 했고 지금껏 그 맹세를 지켜왔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신문은 “ㅎ 일보”입니다. 신문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가 있으면 언제나 그 신문을 보라고 권하다 보니 그 신문사 마케팅 담당이냐고 놀림을 받곤 하지만 저로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 신문은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 중에 가장 조용합니다. 신문이 조용하다는 건 편집에 질서가 있으며 선정적인 제목이 적다는 뜻입니다. 외부 필자 중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그 신문의 칼럼니스트들은 다른 신문에 쓰는 사람들보다 품위가 있어 논조도 억양도 눈 먼 말 같지가 않습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ㅎ 일보”는 드러내놓고 특정 정파를 편들거나 자기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는 신문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둘째, 그 신문은 질 낮은 독자에게 아부하거나 천박한 풍조를 부추기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는 모 일보는 선정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뻥튀기해서 크게 만드는 버릇은 제가 기자 노릇을 하던 80년대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지나칠 정도로 점잖은 척하던 모 일보는 점차 독자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대에 맞춘다고 갈팡질팡하는 그 신문을 보면 젊어서 해보지 못한 걸 늙어서 해보겠다고 천박하게 처신하는 중년을 볼 때처럼 안타깝습니다.

“ㅎ 일보”의 세 번째 장점은 얇다는 겁니다. 신문 자체도 얇은 듯하고 함께 오는 광고지도 적습니다. 친구들은 그 신문사가 돈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신문이 많이 팔리지 않으니까 광고지도 조금 오는 거라고 하지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제가 볼 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닦아도 도道는 도, 아닙니까? 하루 지나면 신문지가 될 신문을 두껍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신문이 거의 유일한 정보원情報源이던 시절도 아니고 신문지가 정육점 포장지로 재활용 되는 일도 드무니 말입니다.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왔다고, 한 가지 정보라도 더 알아야 한다고 눈에 불을 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슬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찰이라는 실에 꿰이지 않은 정보와 지식은 세상을 소란하게 만들 뿐입니다. “ㅎ 일보”엔 “ㅈ 일보”보다 기사 수가 적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ㅈ 일보”라고 세상 소식을 다 실을 순 없는 거고 세상일을 다 알아야만 현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옛말은 오늘에도 유효합니다. 여러 사람이 땀 흘려 만든 신문을 7개월씩 무료로 준다면 무언가 사기가 숨어 있는 게 아닌지, 그들이 흘린 땀이 진짜 땀인지 한번 따져볼 일입니다. 두어 달 후에 아우가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ㅈ 일보 끊었어. 아무래도 못 보겠더라고. ㅎ 일보가 좋다고 했지? 그거 봐야겠어.”

여러분도 “ㅎ 일보” 한번 보시지요. “ㅎ 일보” 보급소는 선심도 쓰지 않고 별로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온 후 여러 번 전화를 건 후에야 구독할 수 있었습니다. 보급소에서 오만하게 굴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위의 장점들을 몸소 체험해보십시오. 네? “ㅎ 일보” 구독 신청 전화번호요? 글쎄요, 그건 아무래도 인터넷에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