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역시에서 최근에 조사한 것을 보면 노인들이 설 선물로 가장 반기는 선물은 현금이고, 가장 받기 싫어하는 선물은 술이라고 합니다. 빛고을노인건강타운에서 광주지역 60세 이상 노인 500명을 대상으로 설 명절에 관한 의식조사를 한 것인데 자그만치 76퍼센트의 응답자가 현금을 원했다고 합니다. 건강식품이나 여행상품권을 원한 분들도 있었지만 각각 10퍼센트와 4퍼센트에 그쳤습니다. 현금 수입이 줄어 불편을 겪거나 고생을 하시는 어르신들로선 당연한 일일 겁니다.
기사를 읽다 보니 이근삼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존경받는 극작가고 교수이셨지만 제게는 참으로 따사로운 이웃이셨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는 선생님의 함자 뒤에 (1929~)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2003년에 돌아가신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엔 "평양에서 출생, 1946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신 후 1959년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연극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고 나와 있는데 생사를 잘못 기재한 사전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공부를 마치신 후엔 동국대학교 전임강사, 중앙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1969년부터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셨다고 하는데, 선생님과 저희 가족이 이웃이 된 것은 1980년대 말 저희가 평창동의 자그마한 빌라의 주민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선생님은 약주를 즐겨 하시어 거의 매일 취한 상태로 귀가하시곤 했지만 십여년 한 계단을 쓰면서도 사모님이 언성을 높이시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탁수 선수를 하셨다는 사모님은 움직임도 우아하셨지만 무엇보다 푸근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참 아름다우셨습니다.
어느 해 연말 홍조를 띤 선생님이 저희 집 벨을 누르셨습니다. 잘못 누르신 건가 하고 문을 여니 선생님이 제 남편과 함께 서서 어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퇴근 길 우연히 마당에서 만났다며, 마침 12월 31일이니 당신 댁에 가서 한 잔 하며 송년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강력하게 권하시어 늦은 시각임에도 선생님 댁으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아껴두셨던 발렌타인 21년짜리를 꺼내오셨고 사모님은 경험많은 살롱의 매니저처럼 태연하게 안주거리를 내오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제가 위스키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술을 마셔보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참 향기로운 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 가지 다정한 말씀으로 저희를 격려하신 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드는 제자들에 대해 자랑하셨는데, 오직 한 가지 불만은 제자들이 술 대신 건강식품을 가져오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겐 술이 보약인데 자꾸 몸에 좋다는 것만 가져온다는 거였습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정말로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그 후 언젠가 신문에 쓰신 수필에서도 술을 가져오지 않는 제자들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셨기에 저희 집에 있던 술 중에 제일 좋다는 걸 한 병 드렸더니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2002년인가 선생님이 폐암에 걸리시어 병원 가까운 곳으로 이사가신 후 뵙지 못하다가 2003년 11월 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신문보도로 알고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을 찾았습니다. 영정 사진 속 선생님은 여전히 웃고 계셨고, 한참만에 만나뵌 사모님은 슬픔 중에도 아름다우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존경스런 두 분과 십여 년을 이웃으로 산 것이야말로 하늘이 저희 가족에게 내린 크나큰 선물입니다.
선물을 잘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받을 사람의 기호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줍니다. 자신에게 많이 있는 것을 주는 사람도 있고, 자신에게 들어온 선물 중에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것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며 자신이 받은 메모까지 끼워주는 무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물을 잘 하려면 선물을 받을 사람을 잘 알아야 합니다. 현금은 넘치나 외로운 노인에겐 현금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좋은 선물일 겁니다. 생활비가 부족해 마음을 졸이는 사람에게는 고급 향수보다 현금이나 쌀 20킬로그램이 반가울 겁니다. 설을 앞두고 부모님과 친지들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부디 대충 고르지 마시고 충분히 고민하여 받는 분들에게 기쁨과 소용이 되는 선물을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눈 비타민'을 선물받았습니다. 고도근시에 난시, 약시, 노안까지 겹쳐 늘 아슬아슬한 상태인 제 눈을 생각해 사들고 온 것입니다. 제 약점까지 아는 오래된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선물, 비타민도 고마웠지만 그가 그것을 사며 저와 제 눈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고맙고 기뼜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 은혜를 입은 두 분께 사소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제 선물도 제 친구의 선물만큼 받는 분들을 기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혜련씨,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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