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박완서 선생을 기리며 (2011년 1월 22일)

divicom 2011. 1. 22. 12:56

박완서 선생님이 오늘 새벽 돌아가셨습니다.1931년생이시니 이 세상 소풍을 꼭 80년 만에 끝내신 겁니다. 선생님과의 작별은 안타깝지만 육체적 고통의 시간을 연장하지 않으신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를 해오셨다고 하니까요. 참으로 열심히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삶을 사신 선생님, 부디 평안하시길 빕니다. 

 

선생님을 한 번도 직접 만나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은 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런 일을 전혀 모르셨을 겁니다.

 

처음으로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대학시절입니다. 대학 2학년 때 학교 학보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의 단편소설 부문에 제가 생애 처음 쓴 작품 '그 길었던 방황'이 당선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죽어라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청춘이었습니다. 여름 방학때 난생 처음 바다를 보았고 그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붙들고 쓴 글이 바로 그 소설이었습니다.

 

스프링노트에 끼적이었던 그 소설을 발견한 건 세살 위 오빠였습니다. 당시 국문과 4학년이던 오빠가 "그거 재미있던데 학보사 문학상에 응모해보지?" 하기에 원고지에 옮겨 적어 학보사로 가져갔습니다. 원고를 제출하고 돌아서려는데 원고를 받은 사람이 원고를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제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그 길었던 방황'이라고 적어서 다시 제출했습니다.

 

1974년 당시 상금으로 받은 5만 원은 가난한 학생에게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돈보다는 상장을 주시며 "그래, 이제 방황이 끝났소?" 어깨를 두드리며 따뜻하게 물으시던 김옥길 총장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굳이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이었는데 어른이 물으시니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니요"라고 수줍게 말씀드렸습니다.  

 

그해 12월 6일자 이대학보엔 제 소설이 두 면에 걸쳐 실렸습니다. 당선을 기뻐하기엔 너무 염세적이었던 저는 자랑할 생각도 못하고 고작 신문 한 부를 집에 가져 갔을 뿐입니다. 소설을 읽어보신 아버지는 "박화성보다 낫다"고 하셨지만 그때는 그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칭찬인지 몰랐습니다. 1930년대에 주목할 만한 작품을 썼던 박화성은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대담한 문체로 암울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 작가였으니까요.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으레 그렇듯 칭찬은 흘려듣고 비난은 크게 듣던 제게 당시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외삼촌의 평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외삼촌은 "글이 너무 위티(witty)해서 잘못하면 박완서 같이 되겠다"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렇게 되느니 글이란 걸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머, 박완서씨 같이만 되면 얼마나 좋아?"했고, 저 또한 오래 전부터 박완서 선생을 매우 존경해왔지만 그 말을 듣던 당시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동아일보인가 어느 신문에 연재하던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으며 '동네 여인들의 수다' 같다고 생각하여 작가로서 선생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보니, 저희 외삼촌은 재능은 타고났으나 시대와 불화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그의 평을 스펀지처럼 흡수한 건 제게 결코 도움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완서 선생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제 첫 소설이 '너무 위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법 그럴싸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아주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깨달을 때쯤, 미국의 대학에 교환교수로 갔던 외삼촌이 쓰러져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갖고 돌아오시니 원망할 시간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1990년대 말인가 2000년대 초인가 박완서 선생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작품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 제 동시대 작가들의 단편 중 가장 뛰어난 몇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선생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 저편에서 들려온 선생의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소리처럼 아름다워 잠시 아무 말씀 드리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께 용건을 말씀드리니 고맙다고, 그러나 그 작품은 이미 다른 사람이 영역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과의 짧은 인연은 끝이 났고 이제 다시는 그 인연을 키울 기회가 사라졌지만, 제 인생은 아직 선생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십대 초입 선생을 몰라본 탓에 다른 길로 갔던 제가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까요.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의 영향을 받은 삶은 아직도 이 나라, 아니 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을 겁니다. 선생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부디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