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조봉암의 부활 (2011년 1월 21일)

divicom 2011. 1. 21. 12:49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이승만)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59년 7월 31일 간첩혐의로 사형당하기 직전에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대법원에서 재심 청구가 기각된 후 겨우 18시간 만에 서둘러 집행된 사형, 억울함이 하늘에 닿았을 텐데도 선생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 예순하나, 사람으로서나 정치인으로서나 한창 일할 나이였습니다.

 

50여년 만에 대법원의 판결로 선생이 간첩 혐의를 벗고 무죄를 선고받으니 정치적 야욕에 희생된 선생과, 선생과 비슷한 이유로 암살당한 여운형 선생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떠오릅니다.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부패공화국이 된 것은 당연히 국가의 영웅으로 칭송되었어야 할 그분들이 어리석은 자객이나 정치꾼들의 모함으로 때이른 죽음을 죽고, 국가적 단죄를 받았어야 할 일제의 협력자들이 벌을 받긴커녕 재산과 권력을 이어받아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으며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 유효득표수의 29퍼센트인 216여만 표(이승만 후보는 500여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정적'으로 부상했습니다. 당시엔 조봉암이 투표에선 이겼으나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1958년 1월, 이 대통령의 '정적 제거' 작전이 개시되어 북한 공작원들이 조봉암을 만났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시경이 선생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1심 재판부는 21차례의 공판 끝에 간첩 혐의 등에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 대통령은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이 안 된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린 듯 1958년 10월 25일 조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도 원심 판결을 확정해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59년 7월 30일 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바로 그 다음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번 대법원 재심이 가능했던 것은 2005년에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던 유족들이 위원회에 진정을 했고, 위원회가 2007년 9월 선생 사건을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했던 겁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한 위원회가 작년 말로 문을 닫았습니다.  

 

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거,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해 발족했습니다. 아직 규명해야할 진실이 있을 텐데 이 위원회가 문을 닫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제 대법원 법정에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지켜본 선생의 맏따님 조호정 여사는 "죽어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됐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스물 한 두 살에 아버지를 빼앗기고 여든 셋 할머니가 되어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드린 조호정 선생님, 선생님은 이제 공란으로 비워두었던 아버지의 묘비에 비문을 써넣게 되었다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조봉암 선생이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이 나라엔 선생과 같은 큰 인물이 꼭 필요하니 말입니다. 기쁨과 실망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 봅니다. 선생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더는 없는지, 혹 지금도 정치, 사회적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은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