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모든 여행기는 그렇게 쓰여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탐욕적으로 여행기의 고전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동방견문록>을 비롯하여 <걸리버 여행기>, <이븐 바투타 여행기>, <돈키호테>, <을병연행록> 등등.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열하일기>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모두 '여행'에 관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국적 풍광과 습속을 나열하거나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스토리를 엮어가거나, 기념비와 사적들, 사람들의 이름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거나. 무엇보다 거기에는 '유머'가 없었다. 이븐 바투타의 지리한 언설은 정말, 끔찍할 지경이었다. 사람 이름은 또 왜 그렇게 긴지!(보통이 한 줄, 심한 건 서너 줄인 경우도 있었다). 돈키호테조차도 <열하일기>에 비하면 따분한 편에 속한다(믿을 수 없다고? 믿거나 말거나!). 결국 형식이 어떻든 그 텍스트들은 스쳐 지나가는 외부자의 파노라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행기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발췌 인용.
위의 글은 '고전평론가'로 자처하는 고미숙 박사가 쓴 책의 '프롤로그'에서 따왔습니다. 이 책은 2003년 3월 처음 출판된 후 판을 거듭해온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고 박사는 '지식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지식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시다시피 <열하일기>는 18세기 조선의 실학자이며 문호인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쓴 26권 10책입니다. 1780년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북경에 가는 삼종형 명원을 수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아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했다고 합니다. 1780년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귀국했으며 그 후 3년여에 걸쳐 퇴고했으나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다가 1901년에야 김택영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고 합니다. 연암은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 해당하는 '안의'의 현감으로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그곳에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다고 합니다. 실학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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