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두보의 슬픔 (2010년 12월 13일)

divicom 2010. 12. 13. 09:42

"붉게 칠한 문엔 술과 고기 썩어나는데  朱門酒肉臭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路有凍死骨 

영고는 지척을 사이에 두고 다르니       榮枯咫尺異 

슬퍼서 더 이상 말하기 어렵구나...       惆愴難再述 ..."

 

               --김이경의 <마녀의 독서처방>에서 인용.

 

 

'불우한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두보지만 그의 슬픔은 개인적 불행의 반영이 아니고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대한 성실한 노여움"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두보가 오늘 이곳에 있었다면 롯데마트의 '통큰 치킨' 소동을 보고 위에 인용된 시보다 더 슬프고 노여움 가득한 시를 썼을 겁니다.

 

골목마다 붉은 간판을 내걸고 작은 수퍼들을 무찌르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작은 가게들이 7, 8천원에서 15,000원까지 파는 치킨을 5천원에 '통 크게' 팔기까지 하는 롯데마트. 그 치킨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선 사람들...

 

그러나 줄 선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치킨을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치킨을 사기 위해 롯데 앞에 줄을 서진 않을 겁니다. 평소에 아이들에게 치킨을 사주고 싶어도 사줄 수 없었던 부모들, 치킨을 먹고 싶어도 비싼 가격 때문에 먹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줄을 섰을 겁니다. 치킨을 먹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 굳이 롯데마트 앞에 줄을 설 필요는 없다는 말이 그들의 귀엔 들리지 않을 겁니다.

 

롯데가 정말 치킨을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서민을 위해 '통큰 치킨'을 판매할까요? 그 답은 롯데가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거슬러 짚어보면 롯데가 서민을 위해 싼 값에 치킨을 판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행히 롯데마트가 '통큰 치킨' 판매를 16일부터 중단한다고 합니다. 롯데의 '치킨 천하'가 일주일만에 끝나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앞에도 몇 달 전 한밤중에 롯데마트가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곳엘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롯데마트에서 제일 가까운 현대수퍼는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현대수퍼의 닫힌 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롯데를 하늘이 알아서 처리해주시라고 기원하곤 했습니다. 

 

엊그제 '통큰 치킨'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을 때 새롭게 단장한 현대수퍼가 문을 열었습니다. 현대수퍼처럼 대기업의 위세에 눌리지 않는 작은 수퍼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롯데마트를 비롯한 수퍼 수퍼마켓(SSM)을 보이콧하여 대기업을 당혹케하는 소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통큰 치킨' 판매를 시작한 9일부터 어제까지 판매량이 10만 마리쯤 될 거라지만 남은 이틀 동안엔 롯데마트마다 튀기는 300마리의 치킨도 팔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롯데가 이왕 튀긴 치킨을 서민들에게 기부하고, 두보를 닮은 사람들의 슬픔이 아주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