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 정리를 시작했는데 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 있는 책을
저쪽으로 옮기고 어쩌고 하며 책꽂이 한 칸을
간신히 비우고 나면 머리가 아파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버릴 책을 버리자고 시작한 일인데
버릴 책은 찾지 못하고 메모 쪽지 두어 장
버리는 게 고작입니다.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메모지중에 한 장이
손에 들어옵니다. 법정 스님의 책 <홀로 사는
즐거움>의 78쪽과 79쪽에서 옮겨 적은 글입니다.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하루 일과를 대충 마치고 나면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다. 이 산중에는 믿음직한 몇몇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청랭한 개울 물소리를
들을 때처럼 내 속이 트이면서 생각의 실마리가
풀린다. 소로우의 <월든>과 허균의 <한정록
(閑情錄)>과 아메리카 인디언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과 조주선사가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주고 있다.
법정 스님처럼 높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책과 책 속의 사람들을 친구라 부르시니 저 같은
필부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한번 방에 들인 친구를
쉬이 내치지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할 겁니다.
버릴 책을 찾지 못해 아팠던 머리가 법정 스님 덕에
맑아집니다. 스님이 한때나마 우리와 함께하셨고
스님의 책들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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