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180: 고통의 시한 (2023년 8월 6일)

divicom 2023. 8. 6. 06:24

어머니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외출을 좋아하셨고

걷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주말에

밖에서 두 딸과 점심을 하시고 나면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귀가하시곤 했습니다. 중년엔 등산을

즐기셨고 노년 초입엔 건강을 위해 춤을 배우시기도

했습니다.

 

올봄 만 아흔셋을 넘기신 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다리가 아프고 고꾸라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끔 통증의학과에 가서 주사를 맞으시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흘 전 집 앞 경로당에서  

함께 사는 맏며느리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혼자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경로당에 와서 자신을

데리고 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100 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 

 

이튿날 아침엔 아예 혼자 일어서는 일조차 어렵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런 상태가 되신 어머니는 극심한

분노와 좌절, 우울에 빠지셨습니다. 젊은 시절엔 

아버지와 끊임없이 싸우셨으나 201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의 말년을 상기시키며, 아버지처럼 담담하고

당당하게 신체적 부자유에 대응하자고 말씀 드렸지만

들으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어젠 둘째 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해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두 딸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고 당신의 방에서 목욕탕까지 힘겹게 걸으셨고

샤워 후엔 다시 그 짧고도 긴 거리를 쉬엄쉬엄 걸어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녁 일곱 시 즈음 두 딸이 당신의 방을 나설 땐

어머니가 조금 안정돼 보였습니다. 여전히 몸의 부자유에

분노하고 좌절하시면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늙는다는 건 젊은 시절 당연히 누리던 삶의 조건들을

점차 잃어가는 것이고 이런 변화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은

담담하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적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슬퍼하고 절망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노년은 최악에 대비하는 시기이자 최악을

겪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겁낼 것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겪고 계신 신체적 부자유를 비롯해 모든 최악의

겅험은 이미 누군가가 겪어본 것이고 함께 겪는 동행들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시한이 없는 최악, 인생보다 오래 가는

고통은 없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