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름다운 사람 정혜원 (2010년 9월 15일)

divicom 2010. 9. 15. 19:41

어제 오랜만에 시내에 나갔다가 혜원씨가 이곳을 아주 떠났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신문에도 당신의 부음이 실렸다는데, 하필이면 내가 신문을 아예 펼치지도 않은

몇 날 중 하루였나 봅니다.

 

가을 햇살 양양한 거리에서 가슴을 후려치는 벼락을 맞았습니다.

가슴이 순간에 굳어 숨쉬기도 힘들었습니다. 왼쪽 가슴에 주먹질을 하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건 내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신은 그때 예술(가)을

후원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교보생명이라는 큰 회사의 여주인답지 않게

으쓱대지도 않고 억지로 우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 외교관들이 당신을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호기심과 장난기로 반짝이던 당신의 두 눈, 위트와 유머로 웃음을 자아내던

말솜씨도 생각납니다.

  

일로만 가끔 만나던 당신과 내가 개인적 접촉을 하게 된 건 하필 아름다운 저 세상을

뜻하는 <Timbuktu>라는 제목의 중편 소설 덕이었습니다. 우연히 둘이 다 좋아하던

미국 작가 폴 오스터 (Paul Auster)에 대해 얘기하다가, 내가 그의 신작 <Timbuktu>를 언급하자,

당신이 읽어보지 못했다며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당신이 빌려간 책을 돌려주지 않기에 돌려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당신은 재미있게 읽었다는 메모와 함께 우리나라 작가가 쓴 장편소설을 이자삼아 함께

보내주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대사관을 떠났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겨울인가 집에 들어 앉아 있던 내게 당신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성매매 여성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다가 아버님이 별세하셨다고, 그동안 아버님을 위해

최선을 했으니 이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남편의 격려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재단의 이사가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분야 일도 모르고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어

재단 일을 도울 수 없다고 말했지만, 당신은 이사로 이름만이라도 올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당신의 열정에 감복하여 이름을 빌려주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이름만 빌려준 나와는 참으로 달랐습니다. 하루 온종일 성매매 여성들을 어떻게

도울까만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2004년 4월 봄빛여성재단 창립 발기인회와 이사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 때에야 당신이 나와 같은 대학의 같은 과를 졸업한 2년 후배임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참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재단은 당신의 남편, 교보생명보험주식회사 신창재 회장이 출연한 5억원 (기본재산 3억원)으로,

성매매 여성들이 그 일을 벗어나게 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에게 재충전할 기회를 주며,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성매매 여성과 활동가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갖가지 활동을 펼쳤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크리스천답게 당신이 하는 일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이

시간이 흐를수록 존경스러웠습니다. 당신은 온 몸과 마음을 재단 일에 쏟았습니다. 늘 과로하는 당신이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3월 재단으로부터 "그동안 감사했다"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메일을 받으니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이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게 남의 물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오랜만에 당신을 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돈이 많거나 힘이 있는 사람에게 연락하기를 꺼리는 성격 탓에 먼저 연락하진 못하고

당신이 연락해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때 이미 당신의 몸이 당신의 열정과 헌신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이야말로 때로는 육신의 가장 큰 적이니 말입니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던

당신이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을 목도하며 하루라도 편한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재단을 시작하기 전 당신이 말했습니다. 기나긴 기도의 응답으로 세 차례나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분이 꼭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일을 하라고 하셨다고, 그러나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겁이 난다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혜원씨,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올린 건 당신이 그 일을 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아름다운 그곳

"Timbuktu"에서 부디 마음 편히 밀린 휴식 취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