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죄를 지었습니다. (2010년 9월 11일)

divicom 2010. 9. 11. 09:45

어제 연희동 사러가 슈퍼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물김치 재료를 사겠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곳에 갔습니다. 작은 배추 한 통, 미나리 한 단, 무 반 개, 꽈리고추 한 봉 등, 채소 몇 가지를 골라 계산을 한 후 슈퍼를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내 우산이 어디 갔지?" 하셨습니다. 그곳에 갈 때 분명히 우산을 받고 갔고 입구에서 물을 털어 비닐옷까지 입혔는데 우산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꽈리고추를 살 때까지도 우산은 어머니 옆에 있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어머니가 움직였던 동선을 되짚어 보았지만 우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누군가 주인 없는 우산을 집어다 고객코너에 맡긴 것은 아닐까 그곳에도 가보았으나, 어머니의 초록 우산은 없었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우산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 직원은 "직원이 발견하면 고객코너에 맡기지만 고객이 가지고 가면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가지고 갔나보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들고 갔나?" 하고 중얼거리자, 어머니는 "그걸 누가 들고 가?" 하며 정신 없는 자신만을 나무랐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 보고 없으면 포기하자고, 계산했던 곳으로 다시 가보았습니다. 우리가 계산할 때 있던 직원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선이 직원 없는 옆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어머니의 우산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산할 땐 그곳에 직원이 있었지만 그이의 근무시간이 끝나면서 그곳에선 계산을 하지 않고, 우리가 계산할 때 비어있던 옆 계산대에서 다른 직원이 계산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와 저는 계산원의 얼굴은 보지 않고 계산원이 있는 것만을 보고, 그 계산대가 조금 전 우리가 계산했던 계산대라고 생각하고 그곳만 살폈던 겁니다.   

 

여든이 넘어 자꾸 자신을 잃어가는 어머니는 "그러면 그렇지, 내가 아직 어디다 우산을 흘릴 정도는 아니야"하며 기뻐하셨지만, 저는 잠시나마 다른 손님들을 의심했던 게 부끄럽고, 끝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부러웠습니다. 저보다 이십여 년을 더 사셨으니 배신도 더 당하고 속은 일도 저보다 많으실 텐데, 여전히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계신 어머니. 어머니는 여전히 제 거울입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